그녀가 펜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나는 굴러버렸다
“죄송요.”
한 음절이 얼음처럼 떨궈졌다. 회의실 바닥에 굴러가던 볼펜이 막 닿으려는 찰나, 그녀가 허리를 구부렸다. 머리끝이 흔들리는 1.5초, 그 짧은 죄책감 어린 눈빛이 내 품 끝을 스쳤다. 나는 그날로부터 일주일째, 빈 엘리베이터에서도 다리가 떨린다.
네가 모르게 흔들리는 나의 심장 지도
왜 하필 ‘펜’이었을까. 왜 그 떨어뜨림이, 그 짧은 굽은 허리가, 내 안의 어떤 고장난 스위치를 꿰뚫었을까.
우리는 ‘섹스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순간들에도 치명적으로 반응한다. 누군가 목을 길게 늘어뜨려 물을 마실 때, 검은 고무줄로 머리를 묶을 때, 혹은 말을 끝내고 살짝 내뱉는 숨 한 모금. 그것들은 우리가 합법적인 욕망으로 분류해둔 영역 바깥에 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인식되지 않은 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몸만 먼저 기억한다.
주혜는 모르고 있었다
“나 진짜 말 더듬는 거 싫어해. 클라이언트 앞에서만 나오니까 더 끔찍하잖아.”
주혜가 말했다. 그러고는 달가닥거리는 말끝을 씹으며 웃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끝이 미끄러질 때, 나는 갑자기 숨을 멈췄다.
밤 11시 47분, 회사 복도.
“아직 끝나지 않았네.”
“나도요.”
“…커피라도 드릴까요?”
주혜가 양손으로 컵을 감싸 쥐었다. 뜨거운 것을 감당하는 작은 인상까지,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저장해버렸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나는 처음으로 ‘말 더듬는 소리’를 검색해봤다. 모니터 너머 주혜는 없었지만, 귀에 남은 실없는 숨소리가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민수는 운동화 끈을 묶을 때마다 멍했다
“형, 여기 앉아서 묶을게요.”
책갈피 마켓에서 만난 민수는 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끈을 두 바퀴 돌리다가 허공에서 멈췄다. 양손으로 고리를 꿰매는 사이, 혀끝이 살짝 내밀렸다. 어두운 주차장 불빛 하나가 민수의 머리 위에만 반짝였다. 그날 이후 나는 민수를 볼 때마다 ‘운동화 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우리는 왜 이렇게 떨리는가
작은 습관이 화살이 되는 순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과녁을 찍는다.
금기의 여운
드러내면 안 될 욕망이기에, 운동화 끈 하나로도 홍채가 확장된다.돌이킬 수 없는 순간
펜이 떨어지는 1.5초 동안, 우리는 이미 훔쳐버렸다. 그래서 돌려줄 수 없다.몸이 기억하는 패턴
누군가 목덜미를 긁던 기억, 엄마의 머리카락 냄새, 초등학교 뒷풀장 녹슨 문고리. 뇌는 접었다 펴지 못한 채, 다리만 먼저 떨린다.
그녀가 떨어뜨린 것은 펜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마지막 방어막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