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47분, 연남동 술집
승연이 담배 연기 뒤로 한 마디 던졌다.
“야, 민지가 준혁이랑 카톡하는 거 봤어. ‘오빠, 오늘 진짜 힘들어요’ ㅋㅋ”
유리잔이 떨어졌다. 발목을 스치는 유리 파편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단어 하나였다. ‘오빠’라는 호칭, 민지가 준혁을 부르는 호칭.
그날까지 나는 민지를 ‘동료’로만 불렀다. 민지 역시 준혁을 ‘친구 남자’로만 보라고 수없이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오빠’라고 부르고, 준혁은 그 호출에 답장을 하고 있었다.
127개의 알림
내가 발견한 건 127개의 메시지였다. ‘민지 💛’라는 닉네임 옆 숫자 127.
오빠, 오늘 진짜 힘들어요.
너랑 얘기하면 위로돼.
언제 같이 밥 먹을까요?
준혁은 대답했다.
힘들겠다 ㅠㅠ 내일 점심 어때?
말투는 평범했다. 하지만 **‘내일’**이라는 단어, **‘점심’**이라는 단어가 나를 발가벗겼다. 그는 나와는 저녁을 먹겠다고 하면서, 민지와는 점심을 먼저 먹겠다고 제안했다.
그녀가 보낸 ‘미니 치마’ 사진
민지는 퇴근 후 스킨십 섞인 사진 두 장을 보냈다. 첫 장은 다리가 드러난 미니 치마. 두 번째 장은 그 치마를 입고 찍은 거울 샷, **‘오빠가 좋아할 것 같아서’**라는 문장과 함께.
준혁은 이모티콘 두 개로 대답했다. 😳🥰
그 두 글자, 그 두 표정이 모든 걸 말했다. 그는 즐기고 있었다. 민지의 욕망, 민지가 건네는 ‘선택받은 자’라는 환상을.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척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척했다. 준혁이 아침마다 ‘출근 길 힘들겠다’며 보내는 카톡에 ‘고마워’라고 답장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민지에게 ‘오늘도 힘내’라고 보내고 있었다. 나와는 반말, 민지에게는 존댓말—아니, 반전된 존댓말. 민지는 ‘오빠’라고 부르고, 준혁은 ‘나도’라고 대답했다.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관계.
3년의 끝, 3분 만에
그날 밤, 나는 준혁에게 물었다.
“민지랑 뭐하냐”
준혁은 머뭇거렸다. 3초의 침묵. 그 3초가 3년을 다 끝냈다.
“그냥… 위로 좀 해줬어.”
위로. 그 단어 하나에 우리는 끝났다. 위로가 아니라 욕망이었고, 그 욕망이 3년을 삼켰다.
나는 그날 이후로 준혁의 이름을 지웠다. 그러나 아직도 휴대폰을 켤 때마다, ‘민지 💛’라는 닉네임이 스르륵 올라온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뒀지만, 그녀가 남긴 127개의 알림은 내 안에서 계속 울린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오빠’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숨이 멎는다. 누군가의 욕망이, 누군가의 선택받았다는 환상이, 단 한 줄의 문자로 내 3년을 삼켰다.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욕망이 계속 번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