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루종일 그것만 생각해?”
여름 냄새가 아직 남아 있는 9월, 하늘은 시커먼 밤으로 물들었다. 에어컨 소리마저 차갑게 들리는 방 안, 지혜는 침대 끝에 앉아 내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너, 요구가 너무 많아. 진짜.
말 한마디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아닌 듯 던진 말이, 내 몸을 얼어붙게 했다. 요구? 내가?
작아지는 속살
지혜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냥’이었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났고, 첫 술자리에서 무릎이 부딪혔다. 그날 이후 2년 반.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했다. 손톱 관리, 생리통 약 사기, 새벽 3시 졸음을 참고가며 그녀가 원하는 영화 틀어주기.
그리고 침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입 안에 있던 맛, 끝내지 못한 손끝의 온도, 허벅지 안쪽 붉은 흔적. 뭐든 그녀에게 맞추려 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늘 부족했다.
내가 아직... 안 왔어.
지혜는 은밀한 속삭임을 주로 침대 맡 벽에 던졌다. 나는 그때마다 머릿속을 비워버리려 했다. 더 늦추지 마, 더 빨리, 더 깊이. 결국엔 발버둥치는 내 몸이 먼저 지쳐버렸다.
두 번째 이야기: 은지와의 112일
은지는 처음 만난 날, 물 한 컵도 내가 따라주지 않았다.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시선이 마주쳤고, 그날 밤 모텔로 향했다.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그러나 112일째 되던 날, 그녀도 똑같은 말을 했다.
너, 뭔가 계속 날 만족시키려만 해.
순간 머릿속에서 폭풍이 일었다. 나는 단지 네가 좋아서 그랬을 뿐인데. 은지는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도 내 기분 알아서 할게. 너무 애쓰지 마.
그 말은,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사랑은 노력 아닌가. 노력도 부족하면 뭐가 남나. 그날 이후 은지의 몸은 점점 멀어졌다. 나는 다시 혼자 남았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심리학자들은 이를 ‘성적 공허감 상쇄 시도’라 부른다. 상대가 오르가즘을 얻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그 책임을 ‘내가 부족해서’로 돌린다. 죄책감은 상대를 더욱 사랑한다는 착각으로 변하고, 결국엔 내 몸이 아닌 내 존재 자체를 숨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성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니라 ‘시험’이 된다. 통과해야 하는 관문, 넘어야 하는 수문장. 그리고 문 앞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나는, 점점 작아진다.
나는 사실 그녀를 원한 게 아니라, 그녀의 만족을 원한 걸까?
“그래도 너는 나를 사랑했니?”
지혜와 헤어진 지 벌써 1년. 가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나는 아직도 침대 맡 벽에 귀를 대본다. 혹시 그날의 속삭임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까.
요구가 많다는 말 속에는, 사실은 ‘내가 너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두려움을 채우지 못하는 나는, 결국 사랑을 포기했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물었다.
그래도 너는, 나를 사랑한 거니? 아니면 사랑한다는 말로 네 부족함을 가린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