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사랑한 적 없대서 차단했더니, 차단된 건 내가 되더라

“사랑한 적 없어.” 단 한 마디에 상대를 차단했다. 그 순간 권력이라 믿은 건 누구의 불안이었을까?

차단허세권력불안집착

훅: 지갑 속 메시지 한 줄

강남역 2번 출구. 서린은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 내렸다. 손에 쥔 지갑이 진동한다. 채팅방에 새 메시지 한 줄이 떠 있다.

사랑한 적 없어.

네 글자. 그걸로 족했다. 서린은 이름을 차단했다. 차단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떨렸지만, 화면이 ‘차단됨’으로 바뀔 때만큼은 속이 시원했다.


욕망의 해부: ‘차단’이 주는 가짜 승리

차단은 사실 미끄러지는 ‘거절’이다. 내 손가락만 움직이면 상대는 내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하지만 그 사라짐이 곧 내 승리라고 착각하는 순간, 나는 이미 패배한 셈이다.

왜?

—상대가 알지도 못한 채 내가 내린 ‘선고’가 권력이라 믿는 순간, 나는 그를 아직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단은 실은 내 불안의 재림일 뿐이다.


실제 같은 이야기: 두 사람의 차단 시즌

1. 유나와 태민의 47일

유나는 연희동 원룸에 산다. 태민과는 어플에서 만났다. 47일째 되던 날, 그녀는 카톡에 남긴다.

나 이제 사랑 없이 못 만나겠어.

태민은 10분 만에 답장.

근데 나 사랑한 적 없는 걸?

유나는 차단. 2초 만에.

그날 밤 그녀는 친구에게 말했다.

아 진짜 시원하더라. 내가 끝내는 느낌?

그러나 이튿날, 유나는 태민의 새 프로필 사진을 발견한다. 흰색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 그 옷은 유나가 선물했던 거다. 사진 속 태민은 웃고 있다. 마치 차단 따윈 없었던 사람처럼.

유나는 문득 깨닫는다. 차단은 그의 존재를 지웠던 게 아니라, 그의 존재를 내 안에만 더 깊이 박아 넣는 도구였다는 걸.

2. 지수와 정호의 톡방 연쇄차단

어느 날 정호는 단체톡방에 들어온다. 지수의 전 남자친구다. 누군가 장난으로 초대했나 보다. 지수는 손에 드는 게 없어서, 바로 차단 리스트를 훑는다.

정호를 차단. 공유 중인 친구 세 명도 추가 차단. 그리고 톡방 나가기.

그날 저녁 지수는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정말 내가 권력을 쥔 건가?

차단은 단 한 명에게만 통보가 간다. 차단 당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다음 날도 웃으며 사진을 올린다. 그러면서도 차단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차단 당한 사람이 가장 핫한 콘텐츠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1. 즉각적인 ‘심판’의 환상

차단은 0.3초 만에 내린 재판이다. 판사도 변호사도 없다. 오직 나만이 증거를 만들고, 법을 해석하고, 형범을 실행한다. 이런 권력은 너무 달콤해서, 고통마저도 갈취당할 때가 있다.

2. 끊임없는 ‘부재’의 존재감

차단은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상대의 부재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사라진 틈새만큼 그 사람이 더 크게 자란다. 마치 죽은 연인의 옷장처럼.

3. 내 안의 ‘겁쟁이’를 숨기는 방법

“사랑한 적 없어”라는 말 뒤에 숨겨진 진짜 말은 이렇다.

나는 너무 사랑했는데, 그 사랑이 들킬까 봐 두려워서 먼저 없애버릴게.

차단은 그래서 종종 사랑의 역설적 고백이다. “나는 너무 사랑해서 너를 참을 수 없어.” 그리고 차단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고백은 영원히 은밀해진다.


마지막 질문

그날 서린은 지하철 안에서 다시 메시지를 봤다. 차단 해제는 3초면 됐다. 오늘까지 열흘째, 그녀는 매일 해제했다 다시 차단했다. 해제했다 차단했다. 마치 제멋대로 허공에 주먹질하는 사람처럼.

내가 차단한 건 정말 너였을까?

아니, 차단당한 건 아직도 나였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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