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잔을 마신 그날 밤, 나는 그녀 앞에서 내 지갑을 열었다. 안에는 고작 이천 원짜리 두 장이 찌그러져 있었다. 주머니를 더 뒤져도 나올 건 동전 뿐. 술잔 너머로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아니, 웃은 게 아니라 조용히 내뱉은 한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한숨이 내 볼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그녀는 말했다.
- 자리를 옮길까?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내가 그녀 앞에서 가장 형편없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연출하는 순간이라는 걸.
거울 속 초라한 짐승
나는 왜 늘 그녀 앞에서만 이렇게 되는 걸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실수나 불행의 연속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의도적으로 내가 가장 초라해 보이는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고의로 지갑을 비워두고, 고의로 늦게 일어나고, 고의로 그녀 앞에서 말을 더듬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초라해질 때마다 느꼈으니까. 그녀의 눈빛 속에서 스치는, '이런 남자를 구해줘야겠다' 하는 미세한 책임감. 그것이 내가 기다리던 반응이었다. 구원받고 싶은 욕망이, 나를 더 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승민이의 조카 사진
서른 둘의 승민은 회사 옆 카페에서 만난 지연이라는 여자를 두 달째 짝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지연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 조카인데요, 첫돌 잔치날이에요. 귀엽죠?
승민은 그날 점심 내내 조카 사진을 최대한 초라하게 묘사했다. 아기의 이마가 너무 넓다, 코가 너무 작다, 손가락이 너무 못생겼다. 사실은 아기가 귀여운지 안 귀여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지연이가 빵을 한 입 먹을 때마다 '내가 왜 이러지'하는 자기혐오가 목끝까지 차올랐다.
그날 퇴근길, 승민은 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 너가 그 아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현수의 뜨거운 김치찌개
스물 아홉의 현수는 헬스장에서 만난 유진에게 매주 딱 한 번씩 러닝 머신 옆 기계를 신청했다. 어느 날 유진이 그에게 말했다.
- 오늘 저녁에 김치찌개 먹을래?
현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콩팥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김치찌개는 못 먹는다고 했더니, 유진은 잠시 멍하더니 말했다.
- 그럼 된장찌개?
그날 밤 현수는 된장찌개를 한 숟갈도 뜨지 못하고 유진 앞에서 사람이 망가지는 과정을 보여줬다. 계속해서 배가 아프다고 했고, 화장실을 자주 갔다. 결국 유진이 먼저 계산을 하고 나갔다. 현수는 술집 화장실에서 울었다.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초라해지면 유진이가 나를 안 떠날까 하는 음흉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구원받고 싶은 야수의 심리
정신과 의사 김현정은 말한다. "초라함이 강력한 매력 코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남성들이 경쟁 사회에서 일정한 수준의 권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이죠."
그녀는 이를 **'역경기원 매력 전략'**이라 부른다. 즉, 일부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어 상대의 구원 본능을 자극하는 것. 이는 심리학적으로 마조히즘과 codependency가 섞인 형태다. 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줄수록, 상대가 나를 떠날 수 없을 거라는 병적인 확신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쌍방향 인과관계를 만든다. 너무 초라해지면 상대는 떠나고, 떠나면 더 초라해지며, 결국은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를 **'자기파괴적 매력'**이라 부른다.
당신은 언제 그녀 앞에서 가장 초라해졌나요?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은 정말로 그녀의 구원을 원했던 걸까요, 아니면 당신이 구원받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초라해진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