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상사 앞에선 개처럼 꼬리 흔들다가, 그의 친구에게선 여자로 변신했다

직장에서 찌그러진 자존감, 그 구멍을 다른 남자로 채우다. 모욕과 욕망의 경계에서 뒤틀린 밀당의 끝은 어디일까.

직장 모욕권력 밀당타인의 욕망찌그러진 자존감사내 연애

하하, 너 그게 뭐야? 별로 안 웃기네

회의실 통유리 너머로 석양이 번쩍였다. 화면엔 내가 만든 기획서가 떴고, 정 과장은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뀌었다.

실장님, 이거 지난번에도 봤잖아요? 똑같은 아이디어라고요.

나는 웃었다. 그렇게 웃어야 했다. 그가 뽀얀 손등으로 내 이마를 툭툭 칠 때도, 회의실에 있던 네 남자가 하하 웃을 때도.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이런 걸 기획이라고?

손등에서 비누향이 났다. 내 머릿속에선 피가 거꾸로 솟았다.


구부러진 목 뒤로 스며드는 것

그날 밤, 나는 정 과장과 술자리를 같이했다. 그가 부른 거였다. ‘회식’이라는 이름의 사후학대.

요즘 너무 딱딱해, 하경 씨. 예전엔 좀 귀엽게 웃던데.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웃었다. 그렇게 웃어야 했다. 하지만 손에 든 소주잔이 떨렸다. 그때, 정 과장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했다.

형, 그만 좀 해요. 봐요, 얼굴 다 빨개졌잖아.

그가 웃었다. 하진 씨. 정 과장의 대학 동아리 후배. 사업부 말단 사원이라 나보다도 아래였다. 그러나 그는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술 마시면 얼굴 빨개지는 거 죄송한데요?

첫 번째 상처를 가진 여자

민하경, 29세. 3년 차 AE. 그날 이후로 나는 두 남자 사이에서 놀아났다.

정 과장 앞에선, 아, 맞아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하진 씨 앞에선, 아, 진짜요?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같은 회사, 다른 온도. 나는 정 과장의 조롱에 꼬리를 내리고, 하진 씨의 말 한마디에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가 지나가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사내 카페에 머물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갔다.

민 선배, 오늘 저녁에도 같이 가실래요?

하진 씨는 항상 그랬다. 단정한데, 어딘가 모르게 은근했다. 정 과장의 눈치를 보면서도 나를 살폈다. 그게 더 흥분됐다.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게 가장 큰 거 아니야?


두 번째 이름이 필요한 순간

그러던 어느 금요일 밤. 정 과장이 먼저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너희들도 일찍 들어가.

사내 술자리에서 그가 먼저 나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진 씨와 나는 남았다. 술집 불빛이 노랗게 흔들렸다.

민 선배, 손 괜찮아요?

하진 씨가 물었다. 손등에 있던 상처. 오늘 오전, 정 과장이 내가 만든 자료를 휴지통에 던지면서 날카로운 서류 가장자리가 스쳤다. 나는 괜찮다고 웃었는데, 하진 씨가 눈치챘던 모양이다.

저도 그 사람이 별로예요.

그가 말했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같은 적. 나는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피가 묻어 있었다.

죄송해요, 손가락이요.

하진 씨가 손수건을 꺼내 손등을 닦아줬다. 손등이 따끔따끔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정 과장이 나를 부르는 방식, 하진 씨가 부르는 방식. 같은 회사 안에서도 온도가 달랐다.


누가 더 뜨거운지를 맞춰보는 게임

그날 이후로 나는 하진 씨와 술을 마셨다. 정 과장이 없는 술자리. 그가 물었다.

선배는 왜 그 사람한테 그래요?

나는 모른 척했다.

뭐가요?

아무 말도 못하고. 말 그대로 꼬리 흔들고.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남자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웃고, 그렇게 꼬리를 흔드는 걸. 나는 대답했다.

너도 그 사람한테 그래요.

하진 씨는 웃었다. 그 웃음이 달랐다.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저도 그러니까, 선배도 그래요?

욕망의 두께는 얼마나 될까

우리는 회사 뒷골목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하진 씨는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달랐다. 정 과장의 손길과는 완전히 다른 온도.

선배, 손 아직 아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손등이 따끔했다. 그가 말했다.

저, 사실은요.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찌그러진 내 모습. 그러나 그의 눈에선 그게 아름답게 보였다.

저도 선배한테 그래요. 꼬리 흔들고. 그러니까.

순간,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우리는 같은 구멍에 빠져있던 거야. 정 과장 앞에선 꼬리를 흔들다가, 서로를 마주할 땐 여자와 남자로 변하는 우리.


별이 빛나는 밤, 우리의 지도

그날 밤, 우리는 회사 옥상에 올라갔다. 서울의 불빛이 눈부셨다. 하진 씨가 말했다.

저희, 여기서만 해도 될까요?

나는 웃었다. 이건 비밀이었으니까. 정 과장의 눈치를 보며, 그의 친구와 눈 맞는 일. 이 더러운, 그러나 뜨거운 비밀.

선배, 저도 모르게요.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손등에 있던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 상처는 정 과장이 준 상처였는데, 하진 씨가 아물게 해주려 했다.


우리는 왜 이 지옥에서 뜨거워지는가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권력에 의한 모욕은 자존감의 구멍을 낸다. 그 구멍은 다른 곳에서 메우려 한다. 우리는 서로의 구멍을 메우려 했다. 정 과장이 낸 모욕, 그 모욕을 또 하진 씨에게서 받아오는 아픔. 그러나 그 아픔이 우리를 뜨거웠다.

나는 직장에서 찌그러진 자존감, 하진 씨는 사내 권력의 말단에서 느끼는 무기력.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핥았다. 그게 더 뜨거웠다.


당신도 누군가 앞에선 꼬리 흔들고 있지 않나

정 과장은 아직도 모른다. 그의 친구가 내 손등을 어루만지는 걸. 우리는 회사 뒷골목에서, 술집 화장실에서,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맞췄다. 그게 더 뜨거웠다.

당신도 누군가 앞에선 꼬리 흔들고 있지 않나. 그러면서 다른 누군가에겐 여자나 남자로 변신하고 있진 않나.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꼬리를 흔들고, 누구에게선 변신하는가.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