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나 오늘부터 이사 중이야.”
재현이 던진 말은 문 앞에서도, 침대 끝에서도, 발코니에서도 계속 들렸다. 유리희는 그 문장을 되씹으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5년이라는 시간이, 그 한 줄로 끝나버렸다.
밤 11시 47분, 침대 시트는 아직도 뜨거웠다. 재현은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유리희는 그 등을 한참 바라봤다. 이마에 남은 키스는 아직도 젖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입술이 살결을 스칠 때마다 숨이 턱 막혔는데, 지금은 차가운 공기만 맴돌았다.
“지금 우리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침대 시트에 파묻혔다. 재현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여 유리희의 이마에 입술을 얹었다. 짧은 키스, 그러나 이별의 맛이 났다. 유리희는 재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간질렸다.
“끝내자. 제발, 끝내자.”
싱크대 위에 놓인 두 개의 유리잔 하나가 반쯤 쓰러져 있었다. 흘러내린 물 한 방울이 싱크대 표면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려가는 모습을 유리희는 하염없이 바라봤다. 재현이 챙기지 않은 것들이 아직도 이 집에 남아 있었다. 샴푸 반 병, 레몬 향이 배어 있는 수건, 그리고 이제는 서로의 것이 아닌 것들이었다.
재현은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유리희가 이사 중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목덜미에서 느꼈던 향기가 불쑥 떠올랐다. 담배 연기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 향기도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녀가 물었던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돌았다.
싱크대에 몸을 기댄 유리희가 재현을 불렀다.
“와인 마지막 한 병이야.”
재현이 다가와 그녀의 뒤에서 몸을 감쌌다. 유리희의 손에 들린 와인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재현의 손이 유리희의 허리를 타고 올라가 허리띠를 풀었다. 와인 한 모금이 유리희의 목끝을 타고 내려갔다. 재현이 입을 맞춘 곳은 그녀의 뒷목이었다. 짧은 키스, 그러나 이별의 맛이 났다.
재현의 손이 유리희의 휴대폰을 향했다. 유리희는 그 손을 가볍게 막았다. 화면이 켜지며 잠금이 풀렸다. 카카오톡 마지막 대화방은 ‘민서’라는 이름이었다. 대화는 짧았지만 시시각각 늘어가는 하트 이모티콘과 ‘밤에 보자’는 제안이 가득했다. 유리희는 재현의 눈을 마주쳤다.
“너, 다른 사람 생긴 거야?”
유리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대답했다.
“아니.”
단 한 마디.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재현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유리희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말이 두 사람을 지금 여기에 머물게 했을 뿐이었다.
사랑이 식으면 남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믿지 못한다. 믿었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 사람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든다. “사랑했던 순간은 진짜였다” 혹은 “미안하다고 말하면 내 잩이 사라진다” 같은 이야기. 그러나 원하는 것은 ‘면죄부’다. ‘미안하다’는 말은 사랑한 만큼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신호다.
유리희는 이제 그 말만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재현이 남긴 마지막 말, 그리고 그녀가 남길 마지막 말. 그 말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거짓이 사라질까.”
새로운 거짓말의 시작일까. 아니면, 그 거짓말이 이제는 끝내야 할 시간일까. 유리희는 혼자 남은 방에서, 그날 재현이 남긴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자신이 진짜로 남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혼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