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침대 위에서 녹아내리는 하얀 알약

형의 장례식에서 주운 발기부전 알약 한 알. 그걸 삼킨 순간, 뜨거워야 할 밤이 차가운 공포로 변했다. 약이 녹는 30분 동안 우리는 진짜 욕망 대신 누군가의 눈빛 속 ‘완벽한 나’를 갈망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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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지금 먹을게.”

계산대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두 권의 티슈. 옆에 가지런히 놓인 작은 투명 봉지 속 하얀 알약은 뜨겁게 빛난다. 나는 눈치껏 손을 덮어. 카드 단말기가 소리를 내며 계산을 끝낸다. 가방 속으로 티슈는 넣고, 알약은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누군가의 시선이라도 피하듯.

밤에 만나기로 한 지효는 음성메시지로만 대답했다. 집에 오면 바로 오케이? 나는 봉지를 한 번 더 툭툭 두드리며 음성을 녹음했다. 당연하지. 그녀의 웃음소리가 뒤이어 흘러나왔다.


뜨거울 거라던 밤, 왜 차가운 공포가 올라왔을까

지효는 붉은 원피스를 입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달콤한 향기가 흩날렸다. 그녀가 나를 재빨리 끌어당겨 문을 닫는 순간, 촛불 하나가 두 개의 그림자를 침대로 끌고 갔다.

오늘은… 오래 가고 싶어.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 한 잔을 따라 입에 넣고선 오른손으로 알약을 꺼내 혀끝에 올려놓는 순간, 입안이 식은땀으로 차올랐다. 약 먹었어? 나를 보더니 지효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직 삼키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가 확 펴지며 눈이 반짝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알약을 삼켰다.


침대 위, 하얀 알약이 녹아내리는 순간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피부가 달아올랐다. 맥박만큼이나 빠르게 흥분이 올라왔지만, 뒷골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지효는 내 팔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그녀의 숨결은 뜨거웠고, 몸은 부드러웠고, 눈빛은… 낯설었다.

침대에 누운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나의 가슴 위로 미끄러졌다. 손끝이 가슴께를 스치며 내려오는 동안,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따뜻함이 진짜인가? 아니면 약이 만들어준 환상인가? 그녀의 입술이 내 귓불을 삼켰을 때, 머릿속에선 차가운 물이 흘렀다. ‘잘해야 해’라는 압박이 피부 밑으로 스며들었다.

오늘은… 정말 잘해줬어.

그 말 한마디가 칼날 같았다. 뜨거운 손길이 내 몸 위를 지나가는데도, 가슴 한복판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아침이 되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끝없이 돌렸다. 지효는 아직 잠든 모양이다. 새벽에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지며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나는 혀를 내밀고 샅샅이 살폈다. 입안 어디에도 그 알약의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목뒤에서는 여전히 쓴맛이 올라왔다.

나는 뭘 잃은 거지? 아니, 뭘 속인 거지?


형의 하얀 봉지

한 달 전, 형의 장례식 당일. 빈소 근처 화장실 변기 뒤에 숨겨둔 하얀 봉지 하나를 발견했다. 봉지에는 “리-벌트라”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나는 형의 핸드폰을 뒤져 메모장을 찾았다.

[4월 3일] 오늘도 못했어. 눈치 안 주려고 애썼지만, 민지가 무슨 눈치인지 알았을까.
[4월 10일] 약국 직원이 좀 뚫어져라 봤다. 내가 약 먹는 걸 누가 알까 봐 떨렸다.

형은 45세.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졌다. 마지막 문자는 약 봉지 사진과 함께 보낸 게 아닐까. 오늘은 너무 떨려서 먹기 전에 먼저 보낸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욕망을 숨기는 순간

형의 장례식에서 나는 화장실에 숨어 하얀 알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효랑 이번엔 꼭…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문 밖에서 들려온 소리. 여기서 뭐 먹는 거야? 아내였다. 나는 재빨리 손을 뒤로 감췄다. 아내는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또 약 먹은 거야?

아내는 알고 있었다. 3개월 전, 내가 힘들어하는 순간마다 작은 봉지를 품에 넣고 다니는 걸.


마지막 질문

지효는 지금도 나에게 그날이 참 좋았다고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묻는다. 나는 그녀에게 누구를 보여주려 했을까? 하얀 알약을 삼키는 순간, 우리는 진짜 뜨거움을 원했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눈빥 속에서 온전한 나를 보고 싶었던 걸까. 침대에 누운 순간, 당신은 무엇을 숨기기 위해 그 작은 하얀 알약을 삼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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