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시 39분, 말소리 지하실
‘말소리’는 을지로 3가 까만 골목 맨 끝 지하실에 있던 펍이다. 시멘트 벽에 담뱃재가 한 톤 가까이 박혀 있고, 손님은 하루에 네 명 넘지 않는다. 그날도 스테인리스 싱크대 위에 뿌려진 소주병 유리가글, 그 사이로 난간 아래 남편 최재민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야, 진짜 말인데—아침에 누워 있는 애 보니까 시체인 줄 알았어. 눈 뜨면 눈 흙이 가득 떠 있고, 숨 안 쉬는 거야. 내가 ‘야, 죽었냐?’ 하고 발로 살짝 건드렸더니 눈 깜빡하더라, 씨발.”
그가 친구들 앞에서 내 아픔을 한 잔짜리 소주처럼 흔들 때, 나는 스윙도어 뒤에서 천천히 숨을 삼켰다. 손에는 칠흑 같은 셔츠 두 장, 그 안쪽에 숨겨 둔 미니카메라 하나. 칼날은 아직 주방 칼대에 꽂혀 있었다. 아직은.
1시 12분, 술잔 위의 해부실
재민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집에 가기가 무서워. 진짜 시체 누워 있을까 봐. 하하.” 웃음이 그을린 벽을 타고 퍼졌다. 누군가가 질문했다.
“그럼 병원은? 병원은 안 가봐?”
재민이 한 손으로 잔을 흔들며 대답했다.
“가요? 절대 안 가요. 누워서 연기만 하는 거지, 죽은 척. 진짜 우울증이면 저러겠냐? 연기밖에 안 돼.”
그 순간 나는 문 앞에서 발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 끝내지 않은 복수는 아직 갈고리처럼 목덜미를 간질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스마트폰에 찍어둔 영상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 3월 3일, 두 달 전—그날 재민이 경찰서에서 조서 받는 모습, 뺨에 손바닥 자국 선명한 클로즈업. 영상은 나에게만 보였다. 아직은.
1시 44분, 딥스틱
나는 친구들 뒤로 다가가 재민의 어깨를 툭 터치했다. 술에 취한 그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재민아, 네가 내 우울을 술값으로 써먹은 날들, 다 기억해.”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나는 그의 카드 지갑을 슬쩍 꺼냈다. 안쪽에 꽂힌 블랙카드, 뒷면에 써 있는 비번은 0303—우리 결혼 기념일. 나는 그걸로 호텔 룸 하나를 예약했다. 이름은 ‘김시내’. 재민이 사내 동호회 채팅에서 ‘김시내’라는 가명으로 운영하던 익명 계정과 똑같은 이름. 룸은 내일 밤 11시, 17층, 금연 더블. 예약 확인 메일은 재민의 직장 메일로 발송됐다.
2시 07분, 침묵 속의 도청
재민이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그의 친구 둘과 나란히 앉았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여러분, 진짜 얘기할까요? 제가 우울증 맞아요. 근데 재민이가 제 아픔을 술값으로 팔아먹는 거예요.”
한 친구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계속했다.
“그래서 전 재민한테도 똑같이 해줄 거예요. 그가 제일 무서워하는 걸요.”
나는 미니카메라를 꺼내 화면을 보여줬다. 재민이 지난주 익명 계정으로 올린 글이었다. ‘우울증 와이프 키우는 7년 차 남편 지친다’는 제목의 글, 2,300뷰, 댓글 120개. 댓글 중 하나는 ‘그냥 이혼하고 새 여자 사귀지’였다. 그 댓글에 재민이 답글 단 모습도 선명했다.
“이혼은 손해지. 이혼하면 반려견 두 마리도 다 내가 키워야 해. 이왕이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지. ㅋㅋ”
2시 33분, 복수의 전주곡
재민이 돌아왔다. 그는 어깨에 걸쳐 둔 재킷을 툭툭 털며 말했다.
“야, 오늘 일찍 가자. 내일 출근도 해야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재민아. 근데 호텔 룸 하나 예약해뒀어. 너랑 나랑 둘이 묵을 수 있는 거.”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뭐? 누가 예약했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메일 안 봤어? ‘김시내’라고.”
재민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호텔 예약 확인’ 메일이 떴다. 그는 눈을 껌벅이며 나를 바라봤다.
“너... 혹시...?”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 새겨진 타투 ‘0303’이 선명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부터 내 아픔은 더 이상 네 이야기가 아니야, 재민아. 네가 훔친 거 다 돌려줄게.”
2시 51분, 마지막 잔
재민이 떠난 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잔을 들었다. 유리잔에 남은 소주는 칠흑 같았다. 나는 속삭였다.
“다음 주, 재민이가 회사에서 해고 통보 받을 거예요. 그가 제일 자랑하던 프로젝트, 제가 익명으로 고발했거든요. 그리고 오늘 밤 호텔 룸—거기서 그가 제일 무서워하는 걸 겪게 될 거예요.”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술이 혀끝을 탔다. 쓴맛, 단맛, 그리고 조금의 복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피식. 근육 하나하나를 천천히 움직여가며. 그들은 모르겠지. 그 웃음 뒤에 어떤 계획이 끝나고 있는지.
3시 12분, 뒷골목
밖으로 나왔을 때, 서울의 봄밤 공기가 차가웠다. 나는 가방 안에 넣어둔 칼날을 꺼냈다. 스테인리스 칼날, 아직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골목 끝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철컥. 뚜껑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침묵.
복수는 끝났다. 아니, 시작되었다. 앞으로 재민이 겪을 모든 일—해고, 호텔 룸에서의 공포, 그리고 그가 내 우울증을 술값으로 팔던 날들의 역습—그 모든 게 이제 그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발걸음을 옮겼다. 을지로 3가 골목, 시멘트 벽에 담뱃재가 한 톤 가까이 박혀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내 아픔은 더 이상 네가 훔칠 수 없어, 재민아. 네가 훔친 건 네 이야기가 되고, 그건 너를 아프게 할 거야.”
침묵 속에서 복수는 피어났다. 그리고 나는 돌아섰다. 골목 끝, 봄밤 공기가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