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립글로스 흔적이 남은 뒷좌석, 우리는 왜 끝내 파국을 선택하는가

한 방울의 립글로스, 사라진 고양이, 새벽 2시까지 기다린 빈 카페. 사랑이 지옥으로 달려가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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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글로스 흔적이 남은 뒷좌석

“그러니까 너는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려고, 내가 너를 떠날 수 없게 만들려고 일부러 망친 거냐?”

한낮의 카페, 창밖으로 뚫려드는 햇살은 벽지까지 황금빛으로 태운다. 유진의 눈동자만큼은 굳은 쇳덩이처럼 차다. 맞은편 민재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한 채, 종이컵을 천천히 으깨고 있다.

“내가 원한 건 아니었어. 그냥… 그렇게 됐잖아.”

그렇게 됐다고?
유진은 입안에서 쓴웃음이 터질까 봐 혀끝을 꽉 깨문다. 지난밤 민재 차 뒷좌석에서 발견한 립글로스. 색깔은 다르지만, 틴트가 남아 있는 입술 모양이 너무도 선명했다. 키스 후 급히 닦아낸 흔적. 그러나 유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민재의 핸드폰을 몰래 들춰봤다. 잠금 해제 패턴은 여전히 0423이었다. 네 자리 숫자가 새겨진 날, 첫 키스를 나눴던 날. 그걸 그대로 두고 있는 순간, 유진은 알았다. 민재는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 하지만 떠나게 만들 거라는 것도.


고양이 루루가 사라진 열흘째

도윤은 3년을 함께 살던 연인 서연이 집을 나선 지 벌써 열흘이었다. 서연이 쓰던 향수 냄새는 아직도 침대보와 커튼에 박혀 있었다. 도윤은 그 냄새를 끊임없이 코로 끌어들이면서도, 동시에 환풍기를 풀가동했다.

내쫓고 싶으면서도 지우고 싶지 않은, 냄새만으로도 찢어지는 이중적인 욕망.

서연이 남긴 반려묘 루루는 어느 날부터인가 식탁 위에 올라가지 못하게 됐다. 도윤은 고의로 유리그릇을 바닥에 놓고, 루루가 조심조심 발을 떼는 모습을 지켜봤다. 당신이 나를 떠나자, 이제는 당신의 고양이마저도 두려움에 떤다. 고양이의 털에 박힌 미세한 떨림이, 도윤에게는 달콤한 복수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새벽, 루루는 열려 있던 창문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발자국이 복도 끝까지 이어졌다. CCTV를 돌려본 도윤은 루루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그 장면을 본 순간, 도윤은 서연이 떠난 날보다 더 깊은 공허감에 휩싸였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구나.


새벽 2시까지 기다린 빈 카페

하린은 전 남자친구의 SNS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여다봤다. 차단은커녕, 그의 새 여자친구와 사진까지 확대해서 봤다. 왜 아직도 똑같은 카페에 가고, 똑같은 각도로 사진을 찍는 거지. 분노 대신 차라리 희열이 뒤틀렸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는 사실이, 무언가를 증명해 주는 듯했다.

어느 날 그녀는 직접 그 카페에 찾아갔다. 우연히 마주칠 확률 1%도 안 되는 곳. 주문도 하지 않은 채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새벽 두 시까지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리며, 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내가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는다는 증거야.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미소 뒤에 숨은 것은 상대를 ‘또 다른 상처’로부터 지키고 싶다는, 기이한 애정이라는 것을.


유진의 속삭임

나는 알고 있었다. 민재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 하지만 떠나게 만들 거라는 것도.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우리는 사랑이 너무 커서, 결국엔 파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영원히 기억될 테니까.


민재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수십 번 반복하다, 결국 립글로스를 꺼내 자신의 입술에도 살짝 찍었다. 불빛 아래 선명한 붉은 틴트. 그리고 문득, 그것이 민재의 차 뒷좌석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색이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원하면서도, 끝내 서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우리가 원하던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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