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레즈인데, 너 되게 냄새나요"
밤 2시 17분. 홍대 근처 오래된 원룸. 유리진은 누워서 휴대폰을 흔들었다. 검은 화면에 푸른 불빛이 튀어. Grindr. 분명히 여자만 봤던 앱이 아닌데. 손가락은 저절로 남자 프로필을 넘겼다. 한 명. 턱선이 날카로운 29살. 'Top. Discrete. Gym fit.'
그의 복근 사진을 확대하면서 유리진은 웃옷 차림으로 일어나 거울을 봤다. 짧은 단발, 커다란 후드티, 그리고... 아래로 흐르는 뜨거운 긴장. 이건 뭐지.
사라진 경계선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는 19살, 첫 여자사람과의 키스에서 시작됐다. 그때 확신했다. 이건 내 본능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남자의 목덜미 사진이 눈앞에 머물렀다. 그의 아담살이 내 손끝에 닿으면 어떤 소리를 낼까.
나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그의 땀 냄새가 코끝에 스쳤을 때 다리 사이가 울렸다. 이건 배신인가, 아니면 탐색인가?
원하던 건 여자였지만, 거부당했던 여자였다. 여자친구는 "너무 부드럽다"고 말했다. 유리진은 그 말 속에 자신의 부족함을 봤다. 그래서 왔다. 이곳에.
첫 번째 DM
"현관문 앞에서 만날까?"
채팅창에 올라온 문장. 상대는 '준호'였다. 31살. 마포구. '근처 산책하다가 담배 피고 싶어졌어요.'
유리진은 복장을 바꿨다. 검은색 체크남방, 와이드진. 여자에게 보여주던 그 맵시 그대로.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살짝 바르다가 손을 멈췄다. 왜 화장을 하지?
현관문 앞. 준호는 작은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멨다. 냄새. 향수와 담배, 그리고 땀. 유리진은 눈을 피했다.
당신 냄새나요.
나도요?
...여기서 담배 피워요?
준호가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뿜으며 유리진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이건 말이 아닌 몸의 대화다. 어느 순간 준호의 손이 유리진의 손등 위로 왔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두 번째 밤, 혜지
혜지는 유리진의 대학 선배였다. 여자. 분명히. 그런데 지난주 혜지는 Grindr에서 남자와의 섹스를 고백했다. "그의 목이 길고, 땀 냄새가 났어. 순간 너무 슬펐지만... 느꼈어."
우리는 왜 '여자다움'에 얽매이면서도 '남자다움'을 떠올릴 때 몸이 떨리는가.
혜지는 말했다. "나는 여자와 자는 게 익숙한데, 그 남자는 한 번도 안 해봤던... 무언가를 건드렸어. 마치 처음으로 헤엄치는 기분."
금기의 심리학
욕망은 종종 금기에서 시작된다. 레즈비언으로서 남자를 원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의 배반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지도와 같은 것이라고.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앱들은 이미 이분법을 깨뜨렸다. 여자를 사랑하지만, 남자의 품에서 쉬고 싶은 날이 있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내가 거부당했던 부분에 대한 보상 심리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3cm
준호와의 네 번째 만남. 유리진은 준호의 집에 갔다. 어두운 거실. 남자의 체온이 차가운 공기 위로 떠올랐다. 준호는 유리진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떨렸다. 유리진은 눈을 감았다. 여기가 3cm 남았다.
내가 원하는 건 정체성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몸을 완전히 아는 순간이다. 남자든, 여자든. 그 누구라도.
준호의 숨결이 닿았다. 유리진은 그의 복근에 손을 얹었다. 단단했다. 그 단단함이 자신의 부드러움을 감쌌다. 이건 레즈비언으로서의 실패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확장인가.
"당신은 어느 쪽에서 더 떨리나요"
문을 나서며 유리진은 물었다. "준호 씨도 누군가를 찾고 있나요?" 준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냥... 누군가가 날 원할 때의 느낌이 좋아요."
돌아오는 지하철 안. 유리진은 전철창에 비친 자신을 봤다. 여전히 여자다. 그리고 아직도 남자의 차가운 손이 떨려오는 손등에 남아 있다.
그럼 당신은요. 분명히 '그쪽'이 아니라고 했던 당신은. 어느 쪽에서 더 떨리나요. 스스로를 지키는 순간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버리는 순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