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우리 그만하자” 한 마디가 문살이었다
강남역 지하 벽돌바. 조명은 한숨처럼 어두웠고, 얼음이 녹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지혜는 칵테일잔을 끝까지 비우지 못했다. 잔에 남은 브런디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손목이 떨렸다.
“여기까지만 하자.”
한 마디. 정우는 그 말이 문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문살’—문지방에 박아놓은 날카로운 못. 닫히는 순간 끝이라는, 그러나 아직 닫히지 않아서 더 아픈.
지혜는 눈을 피했다. 그녀의 무릎이 정우의 무릎을 스쳤다. 피부가 닿는 0.3초, 정우는 숨을 멈췄다. 아,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목끝을 타고 내려갔다.
"더는 못하겠어."
"...알겠어."
알겠다는 말이 전부였다. 그 말 속에는 *‘알고 싶지 않다’*가 숨겨져 있었다.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들었다. 문이 열렸다. 바람이 스며들었다.
침대 끝에서 닿을 듯 말 듯한 손끝
2023년 12월, 을지로 오피스텔. 민재는 침대 끝에 앉아 연희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에어컨 바람에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연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묶는 머리끈을 두 손으로 감쌌다.
민재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멈췄다. 연희의 허리에서 2센티미터, 그 사이에 있던 공기가 너무 두꺼웠다. **‘지금 닿으면 끝난다’**는 생각이 그의 손가락을 굳혔다.
“내일... 이사차 오는 거 맞지?”
“응.”
“내가 도와줄까?”
“됐어.”
됐어. 한 마디에 민재의 체온이 빠르게 내려갔다. 연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발끝이 민재의 발등 위로 왔다 갔다 할 뻔했다. 민재는 발을 뺐다. 그 미묘한 접촉을 피한 순간, 그는 이미 ‘끝’을 선택한 셈이었다.
연희는 속삭였다.
“떠나고 싶지 않은 거잖아, 너?”
그 말에 민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싶었다. 잡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연희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숨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민재는 눈을 감았다.
**‘아직’**이라는 단어의 흔적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아직’**이라는 단어를 남겼다.
아직 손을 놓지 않았다. 아직 입을 맞추지 않았다. 아직 온몸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 아짐들이 쌓여서 끝이 되었다.
정우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텅 빈 방이었다. 침대 시트는 뒤틀려 있었고, 베개에는 지혜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침대 끝에 앉았다. 손끝으로 시트를 어루만졌다. 지혜가 누웠던 곳, 그녀의 무릎이 닿았던 곳.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아직...”
혼잣말이었다. **‘아직 여기 있어’**라는 뜻으로. 그러나 그 말은 이제 아무도 듣지 못했다. 민재는 연희의 짐이 빈 옷장을 바라봤다. 옷장 안에 연희의 향기가 맴돌았다. 그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닫히지 않았다. 아직, 닫히지 않았다.
숨소리가 남긴 몸의 기억
사람은 왜 끝내기로 했는데도 떨리는 손가락을 숨기지 못할까. 왜 마지막 밤, 상대의 숨소리를 머릿속에 새겨놓는 걸까.
정우는 지하철에서 지혜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머릿결이 스쳤던 그의 볼. 그녀의 숨이 닿았던 그의 목.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몸은 기억했다. 몸은 끝나지 않는다.
민재는 연희의 손끝을 떠올렸다. 그녀가 머리를 묶을 때 드러났던 그녀의 목덜미. 그곳에 닿지 못한 자신의 손끝. 그는 손바닥을 꼭 쥐었다. 그 안에 아직 그녀의 체온이 있을 것 같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정우는 새벽 세 시, 지혜에게 문자를 보냈다.
“문을 닫기 전에, 손이라도 한 번 더 잡고 싶다.”
답장은 없었다. 그러나 정우는 벌써 알고 있었다. 지혜가 답장하지 않는 이유를. 그녀 역시 **‘아직’**이라는 틈새를 지키고 있을 거라는 걸.
민재는 연희의 짐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넣었다. 그는 옷장 문을 닫았다. 그러나 살짝 열어뒀다. 연희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틈.
아침이 되면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겠지. 그러나 그들은 아직 서로의 몸에 남아 있다. ‘아직’이라는 단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문이 닫히기 직전, 우리는 서로의 손끝을 떠올린다. 닿을 듯 말 듯했던 그 미묘한 거리, 그것이 사실은 끝내지 못하는 우리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