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7PM, 그의 문장
‘지금 당장 보이지 않으면 당신도 사라져.’
화면 속 조명이 눈부시게 밝은 채팅방. 그녀는 침대 끝에 쪼그려 앉아 손에 든 와인 한 모금을 입에 가져갔다. 숨결이 차창에 안개처럼 흐려지는 듯한 밤. 한 시간 전부터 그의 프로필 사진만 번쩍이고 있었다.
‘거기 있니?’ ‘읽씹 아님 답장.’ ‘진짜로 끝내려는 거야?’
텍스트가 쌓일수록 흥분은 공포로 변했다. 그녀는 마우스 커서를 혀 끝처럼 움직이며 상대의 흔적을 더듬었다. 프로필 사진이 바뀌지 않으면 그가 아직 온라인이라는 뜻. 그러니까 아직 나를 버릴 준비가 안 됐다는 거지.
뒤틀린 관음증
화면 너머 연애의 가장 독한 마약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대의 몸뚱이를 꿰뚫는 시선이 없으니 내가 상상하는 대로 조각내고 확대하며 갉아먹을 수 있다. 창살 없는 감옥, 그래서 더 단단한.
그녀는 매일 밤 화면을 켜뜨고 그의 SNS를 캡처했다. 새로 생긴 팔로워 수, 하트 누른 시간대, 댓글 단 사람의 프로필까지.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으며 증거를 수집했다. ‘나 아닌 누군가랑 대화 중이야’라는 확신 한 방울이면 가슴이 달아올랐다. 화끈한 통증마저 중독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끊임없이 그를 해킹하려는 충동과 같았다. 비밀번호를 몰라도 되니까. 프로필만 들여다보면 그의 하루를 온몸으로 삼켰다.
실화처럼, 두 편의 기록
사례 1. 지하철 2호선 ‘연신내’역
‘민우야, 오늘도 안 오면 정말 끝이야.’
채팅방 이름은 ‘우리만 아는 밤’. 민우는 스물일곱, 대리운전 기사. 민정은 서른둘, 마트 계산대 알바. 두 사람은 네 달째 서로의 얼굴을 모른 채 밤마다 화면을 끼고 숨을 맞췄다. 민우는 운전하다 틈틈이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네온사인 소리가 살아 있는 듯했다.
민정은 매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오늘 오후 8시, 연신내역 2번 출구. 검은 모자 쓴 여자.’ 민우는 대답 대신 배경화면을 바꿨다. 어두운 밤하늘 사진 위로 초승달이 떠 있었다. 지금 나가면, 나는 실제로 존재하게 될 거야.
그날도 민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민정은 역 광장 벤치에 앉아 한 시간, 두 시간을 죄송하다는 문자 하나 없이 기다렸다. 한밤중에 쏟아지는 호루라기 소리만 귓가를 간질였다. 그녀는 마침내 모든 대화방을 나가고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다음 날 민우는 새벽 다섯 시에 찾아왔다. ‘어제는 정말 급한 일이…’—이미 수신 차단된 메시지 한 줄이 떠돌았다.
사례 2. 클럽하우스 ‘지하 음악방’
‘그러면 나도 이제 끝내. 네 목소리만 듣고 사는 게 너무 아파.’
라연이라는 닉네임의 여자와 다윤이라는 남자. 둘은 진행자 없는 음성방을 열고 매일 새벽 2시에 만났다. 라연은 자동차 회사 디자이너, 다윤은 프리랜서 작곡가. 서로의 신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오직 숨소리와 키보드 소리만이 교차했다.
한날 다윤은 말했다. “우리, 이제 얼굴 보지 않을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연의 답은 차갑게 잘렐다. “그러면 너의 목소리가 내 귀에 꼭 맞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게 증명될 거야. 싫어.”
다음 밤, 다윤은 방에 혼자 남았다. 라연이 들어오지 않았다. 3시, 4시, 5시… 해가 떴다. 다윤은 마이크를 끄고 눈을 감았다. 그녀는 내가 현실에서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지 않았을까.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은 둘 다 무서웠던 거다. 화면 너머 사랑이 뚜껑을 열면 허망한 공기만 날아오를지 모른다는 걸.
왜 우리는 애써 ‘안 보이는’ 사랑에 끌리는가
우리가 거기서 사는 건 ‘확신’이 아니라 ‘의심’이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상대는 언제든 내가 아닌 사람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화면 너머 상대는 나만큼이나 고립돼 있다. 서로를 온전히 소비할 수 있는 유리관 속 표본.
정신분석학자 윌프리드 비온은 ‘공포의 투사’라는 말로 이런 감정을 설명한다. 내 안에 뱀처럼 미끄러지는 불안을 네가 대신 품어줬으면 해. 그래서 끝없이 확인한다. ‘나를 사랑하니?’를 ‘나를 지금도 읽고 있니?’로 바꿔 묻는다.
화면은 투명한 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둘을 철저히 가른다. 그 틈새에서 우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부풀린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니 헤어질 일도 없지. 숫자가 아닌 ‘안부’를 돌려주며 끝없이 연장되는 관계의 잔상.
마지막 질문을 화면에 비춘다
오늘 밤, 당신도 누군가에게 ‘지금 당장’ 만나자고 통보할 준비가 됐는가. 아니면 평생 너머의 사랑에 머물며 그를 움켜쥐고 있을까.
화면이 꺼지는 순간, 그대로 끝날 관계를 지금 이 손으로 끌어내올 용기가 있는가. 없다면, 차단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계속해서 텅 빈 채팅방만 바라보게 될 거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한 이별을 무한한 ‘읽씹’으로 바꾸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