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야?”
레이디 디올 박스를 뜯던 내가 멈췄다. 봉투 안에 꼭 접은 종이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청구서. 배송지는 아내의 옛 서교동 원룸, 결제자는 ‘김준혁’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배송지는 왜 그쪽으로 했어?"
아내의 손이 0.5초 만에 굳었다.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 그냥… 실수."
실수. 아내가 숨기고 싶을 때 쓰는 말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뭔가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속옷 서랍은 점점 고급 브랜드로 채워졌다. 샤넬, 끌로에, 스텔라 매카트니. 월급날이면 ‘가사도우미비’라는 항목으로 몇십 만원이 빠졌다. 그리고 화장대 위에 새 향수가 하나 놓였다.
"이번엔 또 뭐야?"
"회사에서 줬대. 프로모션 샘플."
그때마다 나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밤마다 그녀의 카드 사용 내역을 들여다보았다. 강남구청역 모텔, 청담동 와인바, 그리고 낯선 남자 이름과 함께 찍힌 레이디 디올.
한낮 호텔 로비.
"죄송해요. 진짜 실수였어요."
아내는 눈을 피했다. 손목에는 그가 선물한 시계가 차려 있었다. 집에 있던 시계는 아니었다.
"김준혁은 누구야?"
"그냥… 옛날 친구."
"옛날 친구가 왜 네가 산 가방값을 냈어?"
침묵이 흘렀다. 로비의 피아노 음악이 갑자기 시끄럽게 들렸다.
"우리 그만하자. 여기서."
아내가 일어섰다. 뒷모습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내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김준혁’을 검색해봤다. 인스타그램 프로필 사진, 그녀와 같은 대학 출신. 최근 사진에는 우리 집 근처 카페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손에 들린 컵은 우리 부부가 자주 가던 곳.
며칠 후,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
"…"
"그냥… 내 돈 쓰고 싶었어. 네가 날 어떻게 볼지 몰라서."
"그래서 디올 가방은 실제로 누구 거야?"
아내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마를 찌푸렸다.
"내 거야. 하지만 값은…"
말이 잘렸다. 그 가방은 그녀의 욕망이었고, 동시에 나의 굴욕이었다.
오늘도 청구서가 날아왔다. 여전히 그녀의 옛 원룸 주소. 결제자 이름은 ‘김준혁’.
나는 봉투를 뜯지 않았다. 문앞에 놓아두고, 아내가 직접 가져가길 기다렸다.
손끝이 가죽 끈을 어루만진다. 시가 끊긴 지 얼마나 됐는지, 가죽 냄새가 이빨 사이까지 파고든다.
"240…"
숫자가 입안에서 굴러간다. 그녀의 발끝이 아닌, 누군가의 발끝을 위한 하이힐.
침대 위에 놓인 레이디 디올. 에나멜이 반사하는 불빛이 눈부시다. 손에 든 청구서는 여전히 접힌 채.
김준혁
신용카드 승인
레이디 디올 미디엄
에나멜 하이힐 240mm
종이를 비벼 접는다. 가죽 냄새가 손등에 배어든다.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 샤워 물소리, 침대 스프링 소리—모두가 들리지 않는다.
가방 끈을 끌어당긴다. 가죽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묵직한 떨림이 전해진다.
"…여기 있구나."
하이힐 상자가 흔들린다. 뚜껑을 열어보지 않아도, 새 가죽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240mm. 그녀의 발이 아닌, 누군가의 발을 위한—
가죽 끈을 또 만지작인다. 이마에 스미는 냄새가 차분히 내려앉는다. 손목이 떨린다.
"…"
말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가죽 냄새만이, 고요하고도 날카롭게, 방 전체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