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끝, 2시 17분
햇살이 47도 각도로 내려앉아 새하얀 시트에 타닥타닥 굽는 냄새를 냈다. 하경의 손가락은 아직도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내 발끝에서 시작해 종아리를 타고 무릎 뒤로 파고들 때마다 실내는 끈적한 습기로 흐물거렸다.
"가만히 있어 봐."
그가 말했다. 나는 말 그대로 가만 있었다. 등이 닿은 철제 침대 헤드가 시원하게 파고들었고, 숨겨왔던 열이 코 끝으로 솟구쳤다.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니, 처음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무릎 꿇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걸,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
"그래, 너는 원래 이런 앤가 봐"
회색 차양이 드리워진 시계는 2시 17분을 가리켰다. 하경이 내 팔목을 잡았다. 아직 숨도 고르지 못한 채로.
"너는 원래 이런 애였어?"
짧은 문장이 칼끝처럼 날았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원래 어떤 애였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그 질문이 흘러내리는 순간,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확실히 잊어버렸다.
그가 떠난 뒤로도 그 질문은 계속 숨을 쉬었다. 나는 그가 없는 방 안에서, 내가 없는 나를 찾았다.
욕망의 해부실
사실 나는 그를 원한 게 아니었다. 그가 내게서 사라진 이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그를 통해 발견한 나의 그림자를, 그가 내게 투영시켜준 희생자의 모습을 사랑했던 거다.
열에 아홉 번은 내가 먼저 무릎 꿇었다. 그가 원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먼저 단추를 풀었다.
"그는 나를 통해 버려진 여자의 전형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의 시선 속에서 버림받는 여자의 전형이 되고 싶었다."
그날도 그랬다. 그가 말했다. "조용히 해 봐."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 순간이 영원했으면.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완전히 사라진 나를 보았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소희의 이야기
소희는 32세, 광고 대행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지난 3년간 재혼한 남자와 계속되어 온 관계. 그는 아이 둘을 둔 아버지였다.
그녀는 매주 수요일 오후 3시, 그가 딸의 피아노 학원을 데려다주는 시간에 아파트 현관을 살짝 열어두었다.
"처음엔 그냥 커피였어요."
손에 든 아메리카노 잔이 떨렸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근데 그가 문을 닫고 나를 벽에 세웠을 때, 저는 그런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죠. 누군가가 저를 아주 낮은 곳으로 밀어넣어주길."
소희는 나지막이 웃었다.
"그가 떠난 건 6개월 전. 근데 아직도 저는 그 시간에 현관문을 열어두어요. 아무도 안 와도 좋아요. 그냥 제가 그 시간에 문을 열어둔다는 사실만으로도 전 살아있는 것 같아서."
민재의 밤
민재는 28세, 회계사.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흥분하진 말라고."
우리는 1년 넘게 만났다. 그는 결혼을 약속했고, 나는 언제나 그 말을 믿었다.
그날도 그랬다. 그가 나를 뒤에서 안았을 때, 나는 그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정말 떠나지 않을 거야?"
그는 대답 대신 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가 더 세게 잡아주길 바랐다. 외려 내가 더 세게 끌어당겼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스스로를 지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나를 사용하는 방식, 그건 내가 그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뒤, 나는 무엇으로 나를 지배해야 할지 몰랐다.
금기의 뿌리
왜 우리는 자발적으로 무너지는 것에 홀린 것일까. 심리학자는 말한다. 억압된 욕망은 오히려 더 큰 흥분을 유발한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깨끗한 설명이다. 정답은 더 단순하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먼저 버림받는 연기를 했다. 누군가가 우리를 구원해주길 바라면서,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척 행동했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사랑했다. 그가 나를 지배할 때, 나는 지배당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 지배당하는 내가 되는 순간의 나를 사랑했다.
마지막 문을 닫는다
아니, 문을 굳이 열어두지 않는다. 그가 돌아올 거라는 기대도, 그가 다시 나를 지배해줄 거라는 욕망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럼 이제 너는 누구냐고?"
거울 속의 내가 묻는다. 나는 대답이 없다. 다만, 이 빈 방 안에서 나를 지배할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나는 욕실 거울 앞에 선다. 누가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도 모를 손때 묻은 타일 위에 발이 닿는다. 스팀이 차오르는 속에서 내 손가락이 목덜미를 스친다. 여전히 그의 손이 머물던 지점, 나는 거기를 다시 만진다. 차가움이 아닌 체온. 강제가 아닌 선택.
거울 속 눈동자가 나를 반사한다.
"네가 사랑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네가 사랑한 것은 사라진 너였다."
이제 네가 사라졌으니, 너는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