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너희 침대야?”
사진 속 시트는 분명 내가 고른 네이비 색인데, 왜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있을까. 유리찍은 지문처럼 퍼진 촛점, 그 사이로 남펀의 목덜미에 선명한 홍조가 들어앉았다. 여자는 안경 너머로 피식 웃고 있다. 나는 그 미소에 침대 가장자리를 맨살로 기억한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잘린 손톱 한 조각이 말한다
이혼 서류 한 묶음 위에 그 사진 한 장만 올려두면 사무실 불뇌가 흘러난다. 변호사는 고개를 숙이고, 나는 화장실에서 토했다가 돌아와 형광펜을 꺼냈다. 남펀의 목덜미에 올려진 입술 도장에 주황색 선을 그었다. 이건 내가 가장 먼저 지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이 아니라, 그가 죽기 전에 봐야 할 장면이라고.
자고로 불륜이라는 건 증거가 아니라 결핍의 품질 보증서였다.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차고 넘쳐서’라는 억지를 입증하는 증거. 그래서 증거를 발견한 이는 곧바로 결핍을 확인한다.
"나는 뭘 부족해?"
독백은 파편처럼 떨어졌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아닌 ‘그녀’가 돼 버린 나.
침실에 기름 냄새가 난다
사례 1. 유리는 3개월 전 남펀의 지갑에서 모텔 영수증을 찢어 낼 때, 영수증 뒤에 적힌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답장은 4분 만에 왔다. "그래, 나도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그러고는 유리를 차단했다.
유리는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주, 집 현관에 택배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남펀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과 유리 이름이 적힌 USB 하나. USB 안에는 47초 분량의 영상이 들어 있었다. 침대 위에서 누군가가 잠든 남펀의 머리카락을 한 올씩 잘라 모으는 모습. 유리가 영상을 끝까지 본 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남펀이 집에 돌아온 밤, 살금살금 머리를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사례 2. 승현은 법원 앞 카페에서 변호사를 만났다. 그녀는 가방에서 남펀의 정장 재킷을 꺼냈다. 까만 옷감 위에 굳은 침이 박혀 있었다.
변호사: “이게... 증거인가요?”
승현: “침말고요, 냄새요.”
변호사: “냄새는 녹음이 안 돼요.”
승현: “그럼 재킷을 가져가서 한번 맡아보세요. 방금 세탁한 건데도 여전히 봄비 낀 바닷가 냄새가 나요. 우리 남펜 바다를 싫어하거든요.”
승현은 판사에게 재킷 냄새를 맡게 해달라 요청했다. 물론 기각됐다. 대신 승현은 재킷을 증거품 가방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했다. 한 달 뒤 그 냄새가 가스 냄새로 바뀌었을 때, 승현은 집 안 가스를 틀고 불을 붙였다. 다행히 소방서 통화 기록엔 “남펀의 향수 냄새가 사라졌다”는 말만 남았다.
왜 우리는 증거에 홀린 걸까
심리학자들은 ‘욕망의 지연된 사망 선고’라 부른다. 증거를 마주칠수록 우리는 이미 끝난 사실을 반복해 교살한다. 그렇게 해야만 ‘이제 끝났다’는 말을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
“증거를 보면 알게 돼, 나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걸.”
그래서일까. 이혼 서류 위에 놓인 사진은 결국 현실이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진 속 남펀의 목덜미는 이미 내 몸을 떠났지만, 형광펜으로 그은 선은 여전히 내 손끝에 달려 있다.
불륜이란 다름 아닌 상대에게서 자신의 결핍을 되돌려받는 사업이다. 그래서 우리는 증거를 모으고, 재구성하고, 되풀이해서 상대에게 그 결핍을 다시 던진다. 미안함은 그때가 돼야 흘러나온다.
"미안해, 네가 날 사랑한 게 미안해."
아직도 사과는 없다
나는 이혼 서류를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매주 꺼내본다. 남펀의 목덜미에 형광펜 선이 하나씩 옅어진다. 진한 주황은 옅은 레몬색으로, 그다음엔 알 수 없는 희미한 색으로.
사진 한 장이, 이혼 서류 한 묶음이, 형광펜 한 자루가 끝내는 건 복수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증명하는 장치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아직 미안함을 기다린다. 아니, 미안함이 아니라 ‘너는 이제 끝났다’는 말 한마디를 기다린다.
침대 시트는 네이비에서 베이지로 갈아탔지만, 여전히 그날의 불빛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당신이라면, 과연 어떤 불빛으로 그 사진을 다시 비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