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한텐 네가 얼마나 아픈지만 남았다고 생각해."
그녀는 말했다. 침대에서. 상대가 나였다면 그 말은 달콤한 속삭임이었겠지만, 그녀의 손에 쥐어진 남자의 머리카락은 내가 아니었다. 검은색이 아니라 밝은 갈색. 그 차이 하나가 온 세상을 무너뜨렸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여자를. 그리고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여자를.
피가 난 것은 손끝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왜 남자였어야 했을까? 내가 아닌 그가 가진 게 뭐야?
우리는 종종 믿는다. 동성애, 이성애는 단순한 성적 지향이라고. 하지만 배신은 방향이 아닌 거리에서 발생한다.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떤 것. 그녀의 몸 속에 들어간 남자의 존재는, 내가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상징했다.
페니스. 나는 그걸 원했던 걸까? 아니, 그녀가 아니었던 걸까?
민서는 말했다, 그가 날 닮았다고
민서. 29살, 디자이너. 여자친구 혜원과 3년째 사귀던 중이었다. 어느 남자 후배가 등장했다.
혜원이 술 먹고 들어온 밤, 목덜미에 남자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민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혜원의 말은 치명적이었다.
너무나 쉽게, 너무나 담담하게.
"나도 모르게 그래버렸어. 근데 민서야, 그 사람 너 닮았더라. 네가 남자였으면 딱 저럴 것 같아."
그 말 한마디가 민서를 미치게 했다. 닮았다는 게 더 배신감을 증폭시켰다. 내가 아닌 그 남자가 나를 대신해 그녀를 만족시켰다는 사실.
지환은 화장실에서 울었다. 왜냐하면 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지환. 31살, 마케터. 남자친구 도현과 5년째. 도현은 어느 날 여자 동료와 한 달째 만나고 있다고 고백했다.
"너무 미안해. 근데 너랑 다른 느낌이더라. 부드럽고... 따뜻하고..."
지환은 학창 시절, 남자애들이 "레즈비언 섹스는 진짜 섹스 아니야"라고 놀리던 말을 떠올렸다. 그 농담이 이제 그의 연인에게 현실이 되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지환이 가질 수 없는 "진짜"를 그녀에게 줬다는 사실.
그날 밤 지환은 화장실에서 오줌을 보는 척하며 울었다.
도현은 내가 여자라서 나를 사랑한 게 아니었을까. 내가 남자였다면 이미 떠났을까?
남자가 아닌 나는, 그래서 뭘 할 수 있었을까
금기의 본질은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다. 우리는 종종 동성애를 '선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배신은 선택 이후의 문제다.
남자인 그를 대신할 수 없는 나는, 뭘 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는, 그녀의 만족을 채워주지 못하는 나는.
그래서 우리는 더 부러워한다. 남자가 아닌 나는. 여자가 아닌 나는.
당신의 연인이 당신이 아닌 "그 성"과 잤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를 사랑했다.
우리 사이에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동성애? 아니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항상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일까.
당신의 연인이 당신이 아닌 "그 성"과 잤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여전히 당신일까. 아니면 당신이 아닌 누군가의 그림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