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처음부터 달랐어.”
그가 말했다. 불빛이 흐린 와인바, 우리 사이에 놓인 작은 촛불만이 눈동자를 일렁였다. 그러나 나는 머릿속에서 뚜렷한 장면 하나를 떨칠 수 없었다. 두 달 전, 그가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내려다보데 걸린 순간. 화면에는 ‘지수’라는 이름의 카카오톡 프로필이 붉은 알림과 함께 번쩍였다. 그녀는 긴 생머리에, 도발적인 붉은 립스틱. 그날 이후 나는 그의 시선을 두고 다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시선 속 유령들
그가 나에게 고백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의 눈빛 속에서 수십 명의 여자를 스쳤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검은 정장의 직장인,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대학생, 클럽에서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춤추던 누군가. 그 모든 잔상이 한꺼번에 뒤섞여, 내게 던져진 “사랑해”라는 말 위로 드리워진다.
그의 눈동자는 상자 안 가득 쌓인 사진첩 같은데, 가장 위에 놓인 건 나지만 뒤에 숨겨진 사진들이 눈에 밟힌다.
그래서 나는 고백의 순간조차도 방어적으로 웃었다. 사랑을 받는다는 감각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누군가와 겹쳐 보이는가’라는 불안이 더 크게 다가왔다.
눈빛의 흔적들
사례 하나. 29세,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 유진은 첫 데이트날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 이유를 나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은 제가 앉은 자리에서 3번이나 힙한 여자들을 훑었어요. 그러고선 “당신은 달라요”라고 하죠. 그 말이 뭔지 아세요? 지금껏 봐온 여자들과 ‘비교’해서 달라요. 저도 그 여자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뜻이에요.
사례 둘. 32세, 개발자 윤수는 고백받은 뒤 하룻밤 새 그녀의 인스타그램 팔로잉 600명을 모두 샅샅이 뒤졌다. 그중 20%가 여자 계정. 그는 결국 ‘좋아요’를 누른 다른 여자 사진들을 하나하나 확대해 보다 아침을 맞았다. 고백의 설렘은 7시간 만에 불안으로 뒤바뀌었다.
탐욕의 혓바닝
우리는 왜 이토록 시선의 흔적에 연연할까? 그건 ‘애초에 사랑이란 선택의 여지 없는 독점욕망’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앞으로는 나만 바라봐”라는 끝내 화해할 수 없는 탐욕을 내포한다. 그런데 그 탐욕 앞에, 남자들은 이미 ‘선택’이라는 갈라진 상처를 가지고 온다.
그는 골라야만 했고, 그래서 나 역시 선택지 중 하나라는 걸 깨닫는 순간.
빨간 립스틱 지수, 검은 정장 직장인, 반짝이는 드레스의 누군가. 그들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으로 남는다. 나는 결코 그 가능성들을 지우지 못한다. 오히려 그를 사랑할수록, 그의 눈빛 속 스펙트럼은 선명해질 뿐.
심장에 새긴 물음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당신은 지금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가. 그리고 그 고백 속에, 과연 오직 나만이 투영되어 있는가. 아니면 당신 역시 그 시선 속에서 똑같이 다른 남자들과 섞인 채, 고백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