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키스 직전, 그녀가 말했다]
"내 입술, 화장 좀 봐. 아직도 붉어?" 수진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입술은 사랑니를 뽑은 뒤 남은 피처럼 선명했다.
이건 단순한 색이 아니야. 내가 걸어온 모든 좌절의 색이야.
그녀는 그 말을 소리 내지 않았다. 대신 피어싱 하나를 꼭 움켜쥐었다. 3년 전 울산 클럽 화장실에서 뽑아버린, 잘못 뚫린 코 피어싱의 흉터였다.
[붉은 색을 선택한 이유]
레드필이라 불리는 여자들은 다 알고 있다. 붉은 색은 가장 큰 실패를 가리는 최고의 마스킹 테이프라는 걸.
수진의 첫 실패는 대학 2학년이었다. 그녀는 32살 스튜디오 사진작가와 바닥에 깔린 필름 위에서 처음으로 누워 있었다. "넌 예술이야"라고 속삭이며 그의 카메라는 끊임없이 노출을 조절했다. 하지만 그날 필름은 전부 과하게 노출되어 흰색으로 탔다. 작가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사진보다 훨씬 매력적이야. 그래서 찍히지 않는 거야." 그 말은 결국 "너는 물리적 증거로 남기엔 위험한 애야"라는 뜻이었다. 그날 이후 수진은 입술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실패는 이름표였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 "죄송한데... 혹시 대학 언니 맞죠?" 수진은 5년 만에 마주친 후배 지영의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지영은 그녀가 학과 대표 시절, 비밀 연애로 낙제 위기에 처했던 아이였다. 수진이 그 사실을 총장실에 직접 알렸다. "학생의 학업이 우선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전... 선배 아니죠? 미안해요, 닮은 사람인가 봐요." 지영이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뒤돌아갔다. 아니, 그녀는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다는 걸. 그날 밤 수진은 립스틱을 덧바르며 생각했다.
난 대체 누군가를 지운대로 나도 사라지는 건가.
[화려해 보이는 이유]
미용실 샴푸보다 진한 향수 냄새. 수진은 서울 압구정 미용실 VIP룸에서 헤어를 세팅하고 있었다. 디자이너는 그녀의 탈색된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언니는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서 부럽다니까." 그러나 그녀의 머리는 이미 세 번째 탈색으로 끊어질 지경이었다. "사실은..." 수진이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봤어." 디자이너는 털썩 주저앉았다. "헐, 진짜? 언니가? 인스타에 올라오는 남자들 다 사기친 거였어?" 수진은 미소 지었다. "아니, 그 남자들은 다 실제야. 다만... 내가 그 관계를 망친 거지."
[정리가 되지 않는 마지막 실패]
레드필은 결국 자신의 실패를 정리하지 못한다. 그들은 실패를 수집한다. 매번 새로운 립스틱을 덧칠하며, 새로운 남자의 손을 잡으며, 새로운 도시로 이사하며. 그러나 모든 붉은 색은 결국 또 하나의 망각이자 기억이 된다.
지난주, 수진은 홍대 클럽에서 스물아홉 생일 파티를 열었다. 새로운 남자친구는 작은 케이크를 들고 왔다. "수진아, 너는 왜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거야?" 그는 물었다. 수진은 대답 대신 새 디온 립스틱 '999'를 꺼내어 덧칠했다. 그 색은 마치 그녀가 숨긴 모든 실패의 핏물처럼 선명했다.
그럼 당신은 어떤 색으로 당신의 실패를 숨기고 있나요? 그리고 그 색이 벗겨지면, 과연 누가 당신을 여전히 원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