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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정지. 지갑은 내놔.”
태림병원 암센터 8층 엘리베이터 앞. 나를 해고한 인사팀장 ‘윤채령’이 피 묻은 손수건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지갑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 초록색 간판 위 **‘진료과장 윤채령’**이 반짝였다.
“그건 제 것입니다.”
“이제 내 것이죠.”
그녀는 인정사직서를 내던진 지 17시간 만에 같은 장소에 있었다. 나는 17시간 만에 그녀의 인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품목: ‘소변약’
지갑 안 1호 칸. 하얀 실린더 캡슐 한 알. 라벨엔 **‘소변 보기 전에 복용’**만 적혀 있었다. 약국 영수증이 딸려 있었다.
날짜: 해고 당일. 시간: 오후 7시 13분. 금액: 4,500원.
그날 그녀는 나를 해고한 뒤, 약국에서 이 알약을 샀다. 두 시간 뒤, 홈플러스 12층 화장실 칸막이에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알약을 사진 찍어 회사 내부 게시판에 올렸다.
제목: ‘윤채령 부장이 오늘 팔 곳’
댓글은 230개. 그녀는 다음날부터 3층 화장실을 피했다. 알약 한 알이 복도의 방향을 바꿨다.
두 번째 품목: ‘미래’
지갑 안 2번 슬롯. 체크카드 한 장. 뒷면에 **‘우리 인생, 첫 만남의 날’**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계좌잔고: 3,892,700원.
나는 온라인몰에서 아래 물건들을 샀다.
| 품목 | 용도 | 금액 |
|---|---|---|
| 스마트 도어락 | 그녀 집 현관 | 79,000원 |
| CCTV 카메라 3대 | 그녀가 사는 아파트 복도 | 127,500원 |
| 택배 상자 | 그녀 이름으로 배송 | 2,300원 |
택배사는 그녀의 집 대신 우체국으로 돌려 보냈다. 그녀가 찾으러 가면서 CCTV에 찍힌다. 그녀의 미래는 209,800원에 찍혀 팔렸다.
세 번째 품목: ‘타인의 죽음’
지갑 안 3번 슬롯. 검은색 카드 한 장. **‘사망보험 5천만 원, 수익자 윤채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피보험자: 남편 ‘박종하’.
나는 그녀의 남편에게 익명 문자를 보냈다.
‘당신 아내가 당신 죽음을 사고 있습니다.’
답장은 4분 만에 왔다.
‘나도 그녀가 나를 죽이길 기다리고 있어.’
그날 저녁, 남편은 집을 나섰다. 그녀는 혼자 남았다. 보험금 5천만 원은 미지급으로 남았다.
네 번째 품목: ‘나의 직함’
지갑 안 4번 슬롯. 명함 한 장. **‘㈜케어로드 인사팀장 윤채령’**이라는 직함이 빛났다. 뒷면에 내가 써 둔 메모.
‘당신이 나를 해고한 이유: 회사에 불필요한 인재.’
나는 그 명함을 스캔해 구직 사이트에 올렸다. 제목: ‘연봉 9천만 원, 팀장직 구함’. 연락처는 그녀 핸드폰 번호.
면접 예약 17건.
그녀는 면접날마다 병원으로 뛰어왔다. 환자들은 그녀를 기억했다. ‘그 여자, 우리 과장 맞아?’
다섯 번째 품목: ‘용서’
한 달 뒤, 윤채령이 나를 찾아왔다. 병원 지하 주차장. 그녀는 머리를 숙였다.
“지갑 돌려줘요. 제발.”
“어떤 품목이 필요해요?”
“용서요.”
나는 지갑을 열었다. 마지막 칸에 **‘용서, 가격 미정’**라고 손글씨가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뜯었다.
“이건 안 팔아요.”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지갑을 내려놓는 순간, 그녀의 모든 품목이 지워졌다. 나는 그녀의 용서를 사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복수를 사야 했다.
마지막 영수증
그날 밤, 나는 지갑을 불 태웠다. 재떨이 위로 검은 재가 날렸다. 그 재 속에는 그녀의 소변약, 미래, 남편의 죽음, 나의 직함, 그리고 용서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재를 봉투에 담아, 태림병원 원장실 우편함에 넣었다. 봉투 위 이름: ‘윤채령 부장님께’.
품목명: ‘당신이 내게서 뺏은 것’.
가격: ‘복수 완료’.
세금: ‘인간성’.
당신이 누군가의 지갑을 열었다면,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돈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당신에게 남긴 상처의 수량이다. 그 상처를 계산하면, 복수의 총액이 나온다. 영수증 한 장이 인생을 바꾼다는 건, 진부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날 나는 진짜로 237만 원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렸다.
문제는, 그 237만 원 중 일부가 내 돈이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