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녀는... 끝까지 안 됐어."
준혁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너무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 무심한 목소리를 쥐어짜듯 곱씹었다. 끝까지 안 됐다는 게 뭔 뜻일까. 손이 가지 않던 마른 와인잔을 꼭 쥐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가 샤워하는 사이 침대맡 서랍을 열었다. 안에 있던 건 얇은 실크 브라 한 조각. 36B. 내 사이즈가 아니다.
그녀의 체취가 남은 위치
그 브라를 만지는 순간, 머릿속에 번쩍였던 게 있다. 준혁이 한 달 전 유행한다며 샀다는 새 향수. 마농 드뷔시. 처음엔 달콤한 머스크에 홀렸다가, 나중엔 노란 담배냄새와 섞여 음습하게 코를 찔렀다. 그 향기가 바로 그녀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후회의 늪에 발을 담갔다.
왜 하필 그녀의 냄새를 떠올리게 만드는 향수를 샀을까. 아니, 왜 내가 그걸 써야 했을까.
준혁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관절 사이로, 아직도 미세하게 남아있는 붉은 흉터—그녀가 긴장한 탓에 손톱으로 할퀴어낸 자국—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욕망의 지도 위에서
사람은 왜 전 애인의 몸을 기억하는 걸까. 지킬 수 없는 체온, 흔들릴 수 없는 운동 리듬, 절대 바꿀 수 없는 떨림의 패턴. 그건 단순한 과거이 아니라, 아직도 반쪽짜리 영혼처럼 공기를 흔드는 기억의 신음이다.
준혁은 잠든 사이에도 가끔 손을 움직인다. 허공을 더듬다가, 문득 허리를 부여잡는다. 그 제스처가—숨이 막히도록 차오르는 불안의 고리—어느새 내 몸 위에서도 반복된다.
나는 매일 밤 시계를 확인한다. 2시 47분. 그녀와 함께 있던 시간. 준혁이 새벽에 집에 들어왔던 그날, 2시 47분. 나는 그 시각을, 그 시신경을, 그녀의 눈부신 피부를, 이미지로써 떠올린다. 그가 아직도 그 시각에 눈을 뜨는 건 아닐까.
실제처럼 포개진 두 개의 키스
사례 1. 혜진, 29세, 광고 에이전시
혜진은 남자친구 민수의 노트북을 열었다. 사진 폴더 안에 2020년 5월이 아닌 2021년 5월에 찍은 사진. 혜진과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찍힌 사진은 모두 민수의 전 애인 지아였다. 지아는 입을 맞추는 사진, 부둥켜안는 사진, 그리고—가장 충격적인—민수의 손등에 입술을 대는 장면이 있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포즈. 혜진은 자신이 민수와 처음 키스했던 그 공원 벤치 위에서, 자신이 민수의 손등 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었다.
혜진은 그날 밤, 민수의 손등을 자신도 모르게 한참 쳐다봤다. 그 입술의 결, 그 온도의 흔적. 아직도 느껴질까. 민수는 잠든 사이에도, 가끔 손등을 문지르는 제스처를 반복했다. 지아의 입술이 닿았던 곳. 그곳에, 혜진의 입술은 한 번도 닿은 적 없었다.
사례 2. 수민, 33세, 변호사
수민은 남편 태현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2022년 3월 15일. 오늘도 역시 그녀를 생각했다. 엉덩이에 문신이 있는 여자. 수민은 그날 일기를 읽고, 자신의 엉덩이를 한참 만졌다. 내 엉덩이는 가만한데, 저 문신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그날 이후, 수민은 태현과의 섹스에서 엉덩이를 터치하는 걸 거부했다. 태현은 문득 물었다. “왜 그래?” 수민은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거기에 없는 문신을 대신해, 내가 그녀의 뜨거움을 대신해, 그를 만족시켜야 하는 건가. 태현은 수민의 엉덩이를 더듬다가, 끝내 손을 떼었다. 그 문신의 부재가, 수민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금기 위에 선 우리
우리는 왜 이토록 남의 과거를 탐닉할까. 그건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그건, 이미 끝난 욕망이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운동, 아직도 끝나지 않은 체온,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신음을—우리가 대신 끝내야 한다는, 억압된 무의식이다.
준혁은 자고 있는 나를 안으며 말했다. “너는... 그래, 너는 그래도 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나는, 준혁이 그녀를 떠올리며 나를 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과연 내가 그의 가슴에 안긴 건, 나의 몸인가. 아니면 그녀의 몸의 기억인가.
그래서, 당신은 아직도 그의 손끝에서 떠오르는 냄새를 지워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냄새를 계속해서 마시며 살아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