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기가 생겼대요.
2분 전 왔던 카톡이 문장으로 옮겨질 때 나는 화면을 꾹 눌러 '삭제'를 택했다.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순간, 방 안의 모든 소리가 꺼졌다. 에어컨 소리도, 냉장고 웅웅거림도. 단 한 줄의 텍스트마저 지워졌으니 말이다.
숨을 참는 24시간
지후는 다음날 오후 다시 톡을 보냈다.
확인했어?
……
답장 좀 해줘.
나는 이미 답장했다. 지우는 버튼으로.
그녀가 임신했고, 나는 아빠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말한다는 건 지금의 나를 부숴야 한다는 뜻이다. 결혼 6년 차, 아내의 유산 두 번. 병원에서 들은 말은 늘 같았다.
남편분이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우리는 피임도 안 했다. ‘그래도 안 생긴다’는 건 이미 슬퍼하기를 포기한 진실이었다. 그래서 지후의 몸에 착착 붙은 생명은 우리 부부에게 금기였다.
또 다른 삭제자들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버튼을 누른 이들이 있다.
사례 1. 민서는 두 번 눌렀다
12월 3일 새벽 2시 17분.
민서는 남자친구의 잠든 얼굴을 찍어 3초 짜리 영상을 보냈다. 그리고 37초 만에 삭제했다. 잠시 후 다시 보낸 건 흰색 일회용 봉투 사진이었다. 약국에서 산 ‘그것’이었다.
‘이거 맞아?’
‘맞아.’
‘그럼 어떡하지?’
‘그냥 취소.’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남자친구는 민서가 다음날 병원에 갔다는 걸 영원히 모를 테니까.
사례 2. 정환은 녹음기를 껐다
“형이랑 몇 번 섰는데…… 나 지금 몸이 좀……”
정환은 15초 짜리 음성메시지를 듣고 바로 ‘1분 전’ 표시를 ‘삭제’로 바꿨다. 상대는 회사 동기, 아내의 대학 선배. 술자리 뒤풀이에서 한 차례 흔들렸다. 정환은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친구의 얼굴 대신 딸아이 초등학교 입학식이 떠올랐다.
‘우리 딸이 언니 얼굴 닮으면 어쩌지?’
그 상상이 너무 선명해서, 정환은 대화를 지웠다. 오늘도 아내와 딸아이에게 ‘딸기 케이크 들고 갈게’라고 눌렀다.
임신은 피드 끝에 숨는다
임신 소식은 누가 먼저 말하느냐보다 누가 침묵하느냐로 결말이 갈린다. sns에는 아기 양말 사진, 초음파 영상이 넘쳐나지만, 삭제된 메시지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없다.
- 오늘도 몇 명이 ‘임신했다’는 말을 지웠는지
- 오늘도 몇 명이 병원 행을 포기했는지
- 오늘도 몇 명이 ‘아빠일지도’를 영원히 묻었는지
왜 우리는 지울 수밖에 없는가
심리학자 개리 슈나이더는 ‘은밀한 자기 정체성’이라는 말을 썼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쓰는 이름과는 다른, 지워야만 존재할 수 있는 나 말이다. 지후의 임신은 나를 그 ‘다른 나’로 데려가는 지름길이었다.
- 죄책감의 뒤집기 — 아내에게 배신자라는 낙인보다, 아이에게 아빠라는 이름이 더 두려웠다.
- 시간의 갇힘 — ‘지금의 나’를 지켜야만 ‘나중의 나’도 유지된다는 착각.
- 욕망의 뒷조명 — 숨겨야만 더 선명해지는 불법적인 쾌락.
삭제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내가 계속될 수 있게’ 하는 의식이다. 화면 속 한 줄을 지우는 순간, 현실도 함께 지워지는 듯한 착각이 온몸을 감싼다.
계속되는 무음
지후는 사흘이 지나서 전화를 걸었다. 발신자 이름이 뜨자마자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문자를 보냈다.
3일째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그래도 네가 먼저 말해줬으면 해.
나는 그 문자도 지웠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버지’라는 단어와 ‘남편’이라는 단어 사이, 어둠 한복판에 서 있었다.
너라면, 임신 소식을 받고도 지울 수 있겠니? 아니면, 자신이 누군가를 지웠다는 사실을 평생 안고 살 수 있겠니?
지후는 아직도 톡을 보낸다. 나는 아직도 삭제한다. 화면이 흰색으로 번쩍일 때마다, 나는 아기 울음소리를 떠올린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 울음소리가 너무 또렷해서 귀를 막고 싶다.
지금 이 순간, 너는 누구를 지우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