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맥주 한 캔을 따며 말했다.
"전 남자는... 거기에 문신이 있었어."
순간, 침대 시트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그 문신의 크기, 색깔, 위치까지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상 속에서 숨을 멈췄다. 그녀는 담담했다. 마치 그저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을 설명하듯.
그녀의 숨결이 남아있던 곳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을 거야. 그가 그녀의 손목을 뒤로 꺾으며 속삭였을 거야.
순간, 그녀의 몸 위에서 나는 유령이 되었다. 과거의 남자가 빈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며, 나만 모르는 지도를 탐험했다. 지도의 끝마다, 그녀가 남모를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왜 이런 상상을 하지? 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그녀의 숨결 속에 아직 남아 있다고 믿고 싶어질까.
두 남자의 기억이 섞여버린 밤
민혁은 31살, 광고회사 AE. 어느 밤, 여자친구 수진이 잠든 사이에 그녀의 구글 드라이브를 들썩였다. 2017년 폴더 속, 휴양지에서 찍은 사진들. 수진은 넥타이를 둘러뒀고, 옆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의 손이 수진의 허리에 살짝 닿아 있었다. 3mm정도.
그날 이후, 민혁은 수진의 허리에 손을 얹을 때마다 그 3mm를 떠올렸다. 그래서 손을 떼었다. 그래서 거기를 안아주지 못했다.
"왜 안아주지 않아?"
수진이 물었다. 민혁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3mm의 유령과 함께 잠들었다.
양가죽 소파 위의 진실
서른다섯 살, 디자이너 혜원은 남자친구 정우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네가 20대 초반에 찍은 사진, 인터넷에 아직 떠있던데. 괜찮아?
사진 속 혜원은 홍대 양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올린 채, 누군가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사진은 흐릿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또렷했다. 창백한 기쁨. 그리고 누군가의 손끝.
정우는 그 사진을 보고 잠들지 못했다. 그날 밤, 혜원은 정우가 숨겨뒀던 두려움을 마주해야 했다. 자기 몸이, 자기 과거가, 사랑의 테스트가 된 순간.
"나는 그냥... 그때 그냥 그랬어."
혜원이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정우의 상처가 아니었다. 정우의 상처는, 그녀의 과거가 자신의 욕망보다 더 강렬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우리는 왜 뒤늦게 불타오르는가
과거란,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녀를 사랑했던 시간들이다.
왜 우리는 그 시간들에 집착할까. 왜 우리는 그녀의 몸에 아직도 남아있을지도 모를 남의 입맞춤을 찾아 헤매는가. 그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서 그녀가 기쁨을 얻었다는 사실이,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기쁨보다 더 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우리는 그 불안을 사랑이라 부른다. 우리는 그 불안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한다. 우리는 그 불안이 사그라들 때, 우리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욕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뒤늦게, 광적으로, 그녀의 과거를 들쑤신다. 그녀의 과거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 증명은 이미 늦었다. 우리는 이미, 그녀의 과거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상실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상상하고 있니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누군가의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그 과거가 당신의 현재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당신은 그 과거를 떠올리며, 당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그녀인가, 아니면 그녀의 과거를 통해 드러나는 당신의 욕망인가, 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상상하고 있니. 그리고 그 상상은 당신을 얼마나 더 깊은 어둠으로 이끌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