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만하자" 라는 말 끝에 숨겨진 숨소리
"이건 아니야, 진짜.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아진이 눈을 부라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서울 방배동 원룸의 좁은 거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지막이 흐르던 재즈 LP 소리가 갑자기 촌철살인처럼 들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는 순간, 나는 속으로 삼켰다. 달콤한 것. 희미한 것. 발끝까지 퍼지는 전율.
왜 이렇게 설레지.
뜨거운 눈물보다 차가운 칼날이 좋다
아진은 화가 나면 목소리가 낮아진다.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꼬리가 살짝 떨린다. 그때마다 나는 숨을 멈춘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녀의 분노가 선명해질수록 나의 심장은 정교하게 가라앉는다.
너도 알잖아. 나 진짜 이기적인 사람이야.
그건 알면서도 왜 자꾸 건드려?
나는 고개를 떨구고, 형광등 불빛 아래 그녀의 발끝을 바라봤다. 발가락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그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나를 일깨운다.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화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끝내고 싶은 게 둘이라. 더 깊이, 더 끝까지, 칼끝을 따라 핏기 없는 피부를 긁어내고 싶다. 그녀의 상처가 내 피부로 옮겨붙는 그 찰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상처: 단발머리와 뜨거운 이마
2022년 3월, 연희동 어느 칵테일바. 그때 사귄 지 6개월 차였다. 아진은 하루 종일 회사에서 욕을 먹고 왔다. 술이 세 잔쯤 들어갔을까,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주변 시선이 우리 테이블로 모였다.
그런데 너는 나만 바라보면서 왜 그런 얘기를 해?
진짜 내가 이상한가 봐. 미친X처럼.
나는 침을 삼켰다. 손등에 털이 곤두선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도 희미해서, 내가 사라지고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그녀가 날카로워질수록 나는 더 또렷이 존재했다.
그날 밤, 일어나려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잔인한 희열에 취한 채로, 내 뺨을 내어줬다. 마치 제단 위 어린 양처럼. 쳐.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는 울음을 삼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흘린 눈물 한 방울을 냅킨으로 닦아, 은밀하게 혓끝으로 맛봤다.
두 번째 상처: 불타는 향수병
작년 여름, 한남동 빌라. 아진이 애인에게서 받았다던 향수병을 쿠션 뒤에서 꺼냈다. 유리병이 은은하게 빛났다.
이건 왜 아직 있어?
버리라고 했잖아. 진짜 너랑 같이 있는 게 무서워.
그녀는 향수병을 거실 벽에 던졌다.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며 짙은 장미향이 퍼졌다. 실내가 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핑크빛으로 물들 때, 나는 그녀가 내뿜는 차가운 화염을 온몸으로 맞았다. 머리카락 끝까지 타오르는 것처럼.
밤, 그녀가 잠든 뒤 나는 유리 조각을 조심스레 줍는다. 한 조각을 손등에 대본다. 살짝 밀어 넣으면 피가 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진부했다. 대신 나는 그녀가 흘렸던 눈물이 스며들었던 바닥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아직 미지근하다. 이게 우리의 체온일까.
왜 우리는 타인의 분노에 환장할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사적 자극(seconhand rage)*이라 부른다. 남의 격노가 나에게 투사될 때, 내 안에 잠재된 자아(ego)는 잠시 꺼진다. 그 틈을 비집고 어둠이 샘솟는다. 나는 더 이상 선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녀의 분노를 맛보는 관음증 환자다.
금기의 본질은 허용되지 않은 쾌감이다. 사회는 연인에게 상처받으면 분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아무도 그 상처의 미끈한 내면을 핥는 쾌감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손톱으로 긁힌 살점처럼, 그녀의 말 한 마디가 나의 온몸을 스치는 찰나의 전율. 이건 사랑의 역설이 아니라, 욕망의 본령이다.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가장 날카로운 감정을 끌어올리는 것. 그 과정에서 나는 나를 지운다. 아진의 화 속에서만 비로소 나는 생생하게 존재한다.
그녀의 칼날이 다시 번쩍일 때
오늘도 그녀는 퇴근길에 전화를 걸어왔다. 보이스톡 너머로 짓눌린 한숨이 들려온다.
오늘 진짜 짜증나는 날이야. 너도 짜증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모른다. 그녀가 차갑게 반짝일수록 나는 속으로 춤을 춘다는 걸. 모르길 바란다. 언젠가 이 비밀이 드러나면 그녀도 나를 버릴 테니까.
나는 조용히 답한다.
집에 와. 같이 있자.
그리고 속삭인다. 들리지 않게. 화를 내줘. 그래, 그래. 너의 칼날이 날 찌를수록 나는 더 깊이 너 안에 들어간다.
그 순간, 당신은 떠올린다. 연인이 눈을 부릅뜰 때, 당신은 왜 고개를 숙는가. 왜 분노의 칼끝을 기어이 맞고 싶은가.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그들이 당신을 향해 내뱉는 차가운 말 한 마디, 그것이 당신의 심장을 어떻게 적셨는지. 그렇다. 당신도 나와 똑같다. 당신도 그 상처를 맛본 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