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안 돼. 내일 아침 회의가 있어서.”
나는 그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아니, ‘회의’라니. 일요일 아침에 무슨 회의가 있겠어. 그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동안, 나는 벌써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식으로 찍혔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저 여자는 나에게 관심 없나 봐. 저 여자는 조금만 더 끌면 끊임없이 반응하겠지. 저 여자는…
단 한 입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벌써 다 먹혔다
우리는 카페에서 만났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그는 살짝 젖은 셔츠를 꾸벅 인사하며 벗어 올렸고, 나는 그의 복근이 드러나는 순간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초콜릿 라떼를 억지로 마셨다. 대화는 잘 통했지만, 뭔가 석연찮은 끈적함이 남았다. 나는 저녁을 거절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발가벗고 샤워를 했는데, 문득 스친 상상이 있었다.
‘만약 그가 지금 이 순간, 옆집에서 나를 흘깃 바라보고 있다면?’
그 상상은 퍼즐처럼 맞춰졌다. 우리 아파트 복도 CCTV에서 내 모습을 돌려보는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를 따라 숨죽이는 그. 문 앞에서 신발을 놓고 갈등하는 그.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의 머릿속에선 나의 모든 것이 벌거벗겨져 있었다.
실화처럼 들리는 두 남녀의 기록
사례 1. 지하철 2호선, 19:42
지수는 첫 미팅에서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를 만났다. 이름은 태민. 그는 지수의 손등을 살짝 스치며 “또 봐요”라고 말했다. 지수는 그날 저녁 약속을 거절하고 집에 갔다. 그날 밤, 지수는 잠이 들지 못했다. 왜냐하면 태민이 지하철 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이 꼬리를 물었기 때문. 그는 지수가 타는 객차를 알고 있을까. 그는 지수가 내리는 역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지수는 다음 날 출근길에 실제로 태민을 마주쳤다. 그는 우연을 연출한 것일까, 아니면 나를 따라온 것일까.
사례 2. 강남의 작은 와인바, 22:17
민하는 첫 데이트에서 은근히 손을 잡으려는 남자를 회피했다. 그는 민하의 손등을 스치며 “오늘은 그냥 가요”라고 말했다. 민하는 그 말에 안도했지만, 동시에 서늘한 상상이 스쳤다. 그가 민하의 집 앞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민하는 집에 가서 커튼을 꼭 닫았다. 그런데도 발코니 너머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거절했을 때, 그는 내가 더 절실해지기를 기다린 걸까.
우리는 왜 상대의 상상에 홀려드는가
심리학자들은 이를 ‘금기의 달콤함’이라 부른다. 우리는 상대가 우리를 상상하는 방식을 알면서도, 그 상상의 경계를 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상상 속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조율된 대상이 되기 때문.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상상하는지 알면서도, 그 상상이 깨지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거절하면서도, 상대의 상상 속에서 자신을 다시 그려 넣는다.
‘내가 거절했을 때, 그는 나를 어떤 방식으로 찢어먹었을까.’
그 상상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욕망을 즐기는 방식이다. 우리는 상대의 욕망을 확인하면서도, 그 욕망을 완전히 소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욕망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지기 때문.
당신도 똑같은 상상을 했었을까
첫 만남에서 저녁을 거절했던 당신. 그 순간, 상대가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 찢어먹었는지 상상해본 적 있나요. 아니면, 당신 스스로 그 상대를 찢어먹는 상상을 했나요.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그 상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상상은, 실제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를 움직인다.
오늘 밤, 당신이 거절했던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니, 당신은 지금 그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찢어먹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