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그냥 사랑이 아니잖아"
밤 열두 시 반, 민재는 현관문 앞에 서서 가방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열쇠를 꽂지도, 벨을 누르지도 못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여자 웃음소리, 그리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 민재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숙이고 신발 끈을 다시 묶었다. 천천히. 굉장히 천천히.
아, 내가 뭘 하려고 했지?
그는 한 시간 전 회식 자리에서 갑자기 떠올랐다. '네 여자는 왜 아직도 네 집에 사냐' 동료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쓴맛처럼 남았다. 민재는 그때도 웃으며 넘겼다. "그냥, 좋아하니까요." 하지만 그 말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걸 아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그녀의 첫 상륙이었던 날
지하철 2호선 성수역 4번 출구. 지우는 빨간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일단 네 집에서만 있을게, 일주일만. 정말이야." 그녀는 대학로에서 연극 무대 미술 일을 한다고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바로 나가겠다고. 그게 2023년 4월의 일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그 캐리어를 베란다 한쪽에 그대로 두었다.
4월 → 5월 → 여름이 지나가고, 지우는 조용히 민재의 옷장 한쪽을 차지했다. 처음엔 말이 없었다. "미안해, 아직도 못 나가겠어." 그녀는 매번 그랬다. 하지만 미안한 표정은 점점 희미해졌고, 대신 민재의 집은 지우의 집이 되어갔다.
'왜 나는 그냥 있었을까?'
주방에서 발견한 남자의 머리카락
2023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 민재는 야근 끝에 집에 들어왔다.
지우야, 나 왔어.
...
지우야?
침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지우는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화면이 켜진 채. 민재가 걸어가려는 순간, 지우가 재빨리 걸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민재는 그때 주방 바닥에서 긴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다. 아니, 지우의 머리카락은 아니었다. 짧고 굵은. 분명 남자의 머리카락이었다. 민재는 그것을 손에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이건 뭘까. 이건 도대체 뭘까.
침묵의 가격표
지우는 여전히 월세를 내지 않았다. 관리비도, 인터넷 요금도, 심지어 장보기도 민재의 몫이었다. 지우가 사는 동안 그녀의 통장 잔고는 732만 원에서 1,247만 원으로 불어났다. 민재는 우연히 그녀 휴대폰 액정 넘기던 중에 그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돈이 있다. 그냥 내지 않는 것뿐이다.
민재는 그날 이후로 매일같이 집에 가기가 두려워졌다. 회식이 있으면 끝까지 남았다. 지하철에서도 한 정거장씩 돌아서 걸었다.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게 맞나?'
남자들이 괴물이 되는 순간
사실 민재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지우가 그의 침대에서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는 걸 목격했을 때도, 지우가 그의 옷장 속속을 싹 다 갈아입었을 때도. 그는 단지 조용히 물러섰다.
왜냐고?
왜냐고?
그건 아마도 민재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우가 떠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녀가 있음으로써 민재는 뭔가를 '갖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소유욕이 아니었다.
민재는 지우가 떠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없으면 그는 단지 34평 아파트에 혼자 사는 서른아홉의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숨겨진 동의
결국 2024년 3월, 민재는 지우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집을 나섰다.
'그녀가 나를 떠나게 하려고, 내가 먼저 나섰다.'
한 달간 그는 친구 집을 전전했다. 그리고 돌아왔다. 집 문을 열자, 지우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TV를 보며 간식을 먹고 있었다. 마치 1년 전처럼. 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우도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이용하고 있다.
마지막 질문
당신의 집에 아직도 누군가가 있다. 당신은 왜 끝내지 못하는가? 그 사람이 당신의 집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없는 너 자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