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읽씹 42시간째, 그가 아직 안 읽었다

‘나 이제 참 힘들어’를 보내고 42시간째 ‘읽지 않음 1’인 희수. 호텔 503호에서 술 냄새와 니트에 파묻혀, 그의 침묵이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순간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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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씹 42시간째, 그가 아직 안 읽었다

읽씹 42시간째, 그가 아직 안 읽었다

방 503호, 호텔 벨리즈.

침대 헤드보드에 기댄 희수는 손에 든 휴대폰만 바라본다. 화면 위쪽, 초록색 말풍선 옆에 아직 ‘1’이 찍혀 있다. 읽지 않은 채로 42시간째.

“재민아, 지금 어디야? 나 진짜 무서워. 술 냄새에 너 냄새까지 섞여서 미치겠어.”

새벽 3시 13분, 희수가 보낸 음성메시지 1분 7초. 희미한 눈물이 섞인 목소리, 뒤에선 에어컨 바람 소리만 들린다.

“…그냥 뭐라도 해줘. 아니면 ‘읽음’ 표시라도. 제발.”

답장 없음. 아니, 아예 읽지도 않았음. 카톡방엔 여전히 그날 새벽 2시 12분에 보낸 마지막 문자만 남아 있다.

나 이제 참 힘들어


27일간 텅 빈 1:1 채팅방

3년을 함께했지만, 끝은 ‘안 보이기’로 정했다. 재민은 희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보이지 않기로 모든 걸 대신했다. 그날 이후 희수의 카톡방은 이렇게 변했다.

날짜 희수의 말 재민의 말
5/11(목) 오후 11:18 오늘 회식 끝나고 집 가는 길이야
5/11(목) 오후 11:19 너무 늦어서 미안
5/12(금) 오전 7:05 내일 아침에 전화할까?
5/13(토) 새벽 2:12 나 이제 참 힘들어

그 뒤로 27일, 희수는 혼자 말한다. 재민은 ‘읽지 않음’ 상태 그대로. 희수는 매일 밤 그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가 축소했다가, 1:1 채팅방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한다. 한 번은 용기를 내 음성통화를 걸었지만, 삐소리만 32초간 울렸다.


‘차단’은 침묵의 완전 형태

28일 뒤, 은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끝을 냈다. 단 한 차례도 도현의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도현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보냈다.

도현: 너 밥은 먹었니? 도현: 내가 잘못한 거면 말해줘 도현: 그냥 한 마디만 도현: 제발

도현은 나중에 알았다. 은서가 그를 차단했단 걸. 차단은 침묵의 완벽한 형태였다. 도현은 눈을 감으면 그녀의 카톡 프로필이 사라진 게 떠올랐다. 마치 함께 찍은 사진첩 한 권이 하루아침에 날아간 기분이었다.


술 냄새, 니트, 그리고 방 503호

벨리즈 호텔 503호는 연인 투숙에 맞춰 꾸며진 이른바 ‘스위트’다. 오래된 럼 빈티지 향이 카펫에 배어 있고, 미니바엔 작은 위스키 한 병이 열려 있다. 희수는 보라색 니트를 입은 채 침대 끝에 앉아 있다. 발가락 사이로는 미지근한 에어컨 바람이 스며든다.

그녀는 재민에게 마지막으로 줬던 니트를 입고 있다. 목뒤에서 풀린 실이 살을 간질인다. 머릿속으로는 ‘왜 읽지도 않았을까’만 맴돈다. 읽씹이 아니라 안읽씹. 아예 존재조차 부정당한 느낌이다.


침묵은 실제 화상처럼 아프다

뇌 과학자들은 말한다. 침묵으로 인한 고통은 실제 화상과 같은 영역을 자극한다고. 아무 말도 없는 상대를 마주할 때 뇌의 전두엽피질이 활성화된다. 희수는 그걸 느낀다. 배꼽 위로부터 심장까지, 타는 듯한 화끈함이 이어진다.

침묵은 가장 고귀한 폭력이다.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상대를 지옥으로 보낼 수 있다.

희수는 재민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가 축소했다가, 1:1 채팅방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한다. 프로필 사진은 3주째 변함없다. 여전히 3년 전 함께 찍은 사진. 그녀는 한 번도 사진을 바꾸지 못했다. 바꾸면 진짜 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끝내 말하지 않은 한마디가 가장 뜨겁게 태운다

희수는 결국 방을 나선다. 새벽 4시 7분, 호텔 복도엔 에어컨 냄새와 짙은 럼 향이 뒤섞여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30초 동안, 그녀는 한 번 더 확인한다.

‘읽지 않음’은 여전히 ‘1’ 그대로다.


그래서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휴대폰을 붙잡고 있다. 답장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혹은 답장이 오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너는 지금 누군가를 침묵으로 죽이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침묵으로 죽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두 가지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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