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나 안 끌리냐?”
준혁이 한밤의 편의점 앞에서 맥주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불쑥. 말없이.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늘 있던 질문인 양. 나는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그의 목선을 훑었다. 수박처럼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상처가 될 것 같은 대답이 혀끝에 맴돌았다.
“끌려서 어떡해. 너랑 나,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아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캔을 집어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알코올 맛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삼킨 말들의 뒷맛이었다. 편의점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가로등이 우리를 잠시 노랗게 물들였다가, 다시 어둠으로 삼켰다.
집들이 날, 준혁의 새 아파트. 8층 거실 창문 너머로 한강이 잿빛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파에 누운 내가 잠깐 눈을 붙였다 떴을 때, 그가 내 옆에 있었다. TV 음량은 3, 너무 낮아서 드라마 대사마저 숨소리처럼 들렸다.
“자꾸 왜 자꾸 눈을 피기만 해?”
준혁이 말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천장을 응시했다. 반짝이는 조명이 눈앞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다 그의 손이 살짝 다가왔다. 먼저 손등이 살짝 닿았다가, 이내 손바닥이 허벅지 위에 내려앉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살아 있는 듯 떨리는 온도.
‘이건 뭐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친구의 손이었고, 동시에 낯선 사람의 손처럼 느껴졌다. 그가 누구인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든 게 한꺼번에 뒤섞여버렸다. TV 화면에서는 재방송 드라마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여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며 대사를 읊조렸다. “사랑은 참… 잔인하구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준혁의 눈이 나를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 안에 내 얼굴이 맺혀 있었다. 그 눈빛은 차분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나에게서도 시작된 건지, 그에게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안.” 준혁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쉬었다. “손, 뗄게.”
근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0.5초만이라도 늦게 반응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이 스쳤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헤집고, 그리고 아침이 되면 어떻게 될까. 침대 위에서 눈을 떠 서로를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게 될까. ‘어젠… 뭐 했지?’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까. 그리고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술 많이 마셨네’라며 끝을 맺을까. 그 끝에서 우리의 우정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침을 삼켰다. 입안이 메말랐다. TV 화면이 살짝 흔들렸다. 아니, 실은 내 시야가 흔들린 거였다. 준혁의 손은 아직도 내 허벅지 위에 있었다. 떨림이 점점 작아지고, 이제는 미세한 전류처럼 전해지는 감각만 남았다.
“맥주 마실래?” 내가 물었다.
준혁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손을 떼었다. 그 자리에 뜨거운 자국이 남았다. 누가 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는 일어서서 냉장고로 향했다. 그는 맥주 두 캔을 집었고, 나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냉장고 문이 닫히며 ‘딸깍’ 소리가 났다. 우리는 서로를 다시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맥주캔을 따서 한 모금씩 마셨다.
캔에서 올라오는 탄산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까 그 손의 온도가 아직도 내 허벅지에 남아 있었다. 끝내 우리는 서로를 안지도, 키스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TV 앞에 나란히 앉아, 한강이 흐르는 걸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그 장면을 암묵적으로 지웠다. 편의점 앞 대답도, 거실의 떨림도. 하지만 가끔, 준혁이 나를 보며 피식 웃을 때면 그날 밤의 손끝이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닫는다.
파국을 막았던 건 결코 ‘절제’나 ‘이성’이 아니었다.
단지 그날 밤, 나는 욕망보다 더 크고 끈적한 것—우리의 우정이라는 이름의 미래—을 삼켰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