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2시간 뒤면 술집 마감이었다. 시은이 먼저 나가겠다고 말하자, 강우는 잔을 내려놓으며 속삭였다.
“실은… 너랑 사귀면 안 될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목뒤까지 전기가 쏟아졌다. ‘하나 더?’ 시은은 미소를 떼지 않으려 혀를 깨물었다. 그럼 그동안의 키스, 새벽 통화, 반지를 사겠다던 손가락은 뭐였나.
뒤늦게 드러난 규칙
그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었다. 연애 시장에선 이미 남녀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는 절대 내지 않는 불문율이었다.
‘여자도 나른하게 만들면 안 된다.’
강우는 계속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회사 여직원이… 너랑 엮이면 안 돼.
그 애가 내 옛 동아리 후배인데, 걔가 너랑 같은 사진관에서 부스샷 찍은 거 봤대.
말하자마 애는 그걸 커뮤니티에 올렸었지 뭐야.
내가 너랑 만들어지면, 사내 소문이 돌아.
그럼 나도 회사에서 입지가 좁아져.
시은은 침을 삼켰다. 그 애가 날 지인이라고 언급한 걸 강우가 알았다는 말인가. 단 한 장의 사진이, 아니 단 한 명의 지인이 썸을 끊도록 만든다는 게 말이 되나.
여자도 나른하게 만들면 안 되는 이유
여자에게도 ‘절대 넘기면 안 될 선’이 있다. 그건 남자들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 남자판 불문율 | 여자판 불문율 |
|---|---|
| ‘너무 쉽게’ 생긴 여자는 안 봐 | ‘너무 나른한’ 남자는 안 봐 |
| 전 여친과 아는 사이가 있다 → 리스크 | 전 남친 동아리 후배가 있다 → 리스크 |
| 같은 회사 동료와 사귀면 업무에 지장 | 같은 사진관 사진이 돌면 이미지 손상 |
누군가의 변심은 언제나 **‘플러스 알파’**였다. 연애 시장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썸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평판이 움직이는 복잡한 생태계였다.
실제처럼 들리는 두 이야기
사례 1 — 하린, 29세
하린은 지난주 파티에서 만난 ‘준’과 3일 만에 술집 2차까지 갔다. 손을 잡고, 뺨을 맞대고, 나중엔 귀를 간질이던 입술까지.
그런데 다음날 준은 연락을 끊었다. 하린은 동창 혜진에게 물었다.
준이랑 어떻게 된 거야?
아… 혜진이 한숨을 쉬었다. 준이 내 옛 직장 후배인데,
너랑 사진 찍은 거 인스타에 올리니까 걔가 DM 왔대.
‘하린이랑 나한테 똑같이 행동했잖아’ 그러면서 좀 민망하다고…
준이 그걸 보고 부담스러워졌나 봐.
하린은 멍했다. 그저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하나가 썸을 무너뜨릴 줄은.
사례 2 — 지아, 27세
지아는 대학 동기 ‘도윤’과 6년째 우정이었다. 최근엔 그 우정이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영화관에 갔고, 새벽 1시에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라며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유달리 도윤은 ‘어떤 공개 장소’에선 지아를 피했다. 학교 후문 편의점, 동창회, 연극 동아리 모임. 이유를 묻자 도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이 친구들이 너 졸업작품 때 남주 배역 맡았던 애들인데…
걔네가 너랑 나 사귀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
너 졸업작품 키스신 진짜 많았잖아. <span style="color:#999">(웃음)</span>
얘네가 그걸 아는데… 민망해.
지아는 그 자리에서 웃었다. 안으로는 칼날이 돌았다. 민망해서 키스도, 손도,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거냐고.
왜 우리는 이 불문율에 끌리는가
사람은 ‘허용된 관계’보다 ‘금기된 관계’에 더 뜨겁게 반응한다. 다만, 연애 시장의 불문율은 **‘금기’**가 아니라 **‘계산’**이다.
- 누군가의 평판이 나의 평판이 된다.
- 그 사람의 과거가 나의 미래가 된다.
- **‘나른함’**은 희생양이 되기 쉬운 상태다.
연애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갖 지인·회사·동호회·SNS가 실시간으로 주가를 매기는 주식 시장처럼 돌아간다. 그래서 누군가는 ‘마음이 가도’ 발을 뺀다. 손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당신은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가
연락이 끊긴 그날 밤, 시은은 화장실에 앉아 친구 혜진에게 문자했다.
나도 이제 회사 동기 중 누군가랑 사귀면 안 되는 건가? 나도 남자한테 ‘나른한 여자’라는 낙인 찍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혜진은 답장 없었다. 시은은 거울을 봤다. 거기에 적힌 말은 단 한 줄.
우리는 사랑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내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거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