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 지난 지 사흘
생일이 지난 지 사흘, 수진은 아직도 19세라고 말하기 민망한 시각이었다. 투명한 잔 속 맥주 거품이 사르륵 내려앉는 걸 지켜보며, 그녀는 벽시계를 바라봤다. 11시 47분. 유일하게 눈에 들어온 숫자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을 살며시 빗었다. 그 손가락 끝이 왜 이렇게 뜨거울까.
"이제 나이 먹으면 술값 내야 한단다."
멋진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수진은 누가 조명 스위치를 반쯤 내렸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눈이 마주쳤을 때, 세상이 반쯤 꺼지는 줄 알았다.
건우. 문예창작과 교수. 42세. 결혼반지는 분명히 끼고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눈길 끝에서 빛내라고 눈치 챘을까.
시험지 위 서명
다음날 오후, 교양 수업 시험지 위에 수진은 이름 대신 19라고 적었다가 지웠다. 다시 수진이라고 썼다가, 다시 지웠다. 결국 학생증을 꺼내 들었다. 생년월일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렸다가 뗐다가, 다시 가렸다.
건우가 시험지를 거두러 왔을 때, 수진은 서명하는 손이 떨렸다. 건우는 시험지를 받아들면서,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너무 낯익어서, 수진은 아까 한참 그 미소를 상상했던 기억이 슬슬 켜켜이 쌓이는 걸 느꼈다.
"학생증이 필요하네요."
건우가 말했다. 수진은 학생증을 내밀었다. 건우는 그걸 받아들고, 생년월일 부분을 길게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수진을 바라봤다. 그 사이, 23년이 한순간에 지나갔다.
눈을 피하면 피할수록
심리학 시간에 배웠다. '금기 효과'라는 말. 막히면 막힐수록 더 타오르는 마음. 실제로 수진은 그 뒤로 건우와 마주칠 때마다 눈을 피했다. 피하면 피할수록, 뒤통수에 닿는 뜨거운 시선이 더 선명해졌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마주쳤다. 수진은 책을 들고 있었는데, 손이 미끄러져서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건우가 그걸 줍는 순간, 그의 손이 수진의 손에 살짝 닿았다. 그 찰나의 접촉에서, 수진은 전기가 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책,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대화는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수진은 건우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뜨거운지 알고 싶어졌다. 42년을 산 남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 알고 싶었다.
숫자의 굴레
수진은 이제 20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19살이라 말하고 싶었다. 건우는 43세였지만, 그 눈빛 하나에 왜 이렇게 굶주려 있는 걸까.
당신은 나를 본다.
그 말 한마디가 가슴에 새겨질 때,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굴레가 되었다. 19살, 42살. 그 숫자들이 만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내려놓기보단 더 깊이 품고 싶어질 뿐이다.
그리고 그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술집 한구석, 눈치 없이 튀어나온 머리끈. 그 모든 장소는 숫자의 굴레를 잠시 잊게 해줬다.
마지막 서명
학기 말, 수진은 건우의 연구실을 찾았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건우는 책상 위에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수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건우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바라봤다. 그것은 수진이 쓴 논문이었다.
"잘 썼어요."
건우가 말했다.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는 펜을 들고, 논문 마지막 페이지에 서명했다. 그 서명이 끝나는 순간, 수진은 문득 건우의 손을 잡았다.
"저..."
수진은 말을 잊었다. 건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 순간, 수진은 해방감과 상실감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잊혀지지 않는 숫자
몇 년이 지났다. 수진은 이제 대학원생이 되었고, 건우는 여전히 교수였다. 그들은 가끔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수진은 19살의 그날 밤을 떠올렸다. 술집에서 첫 잔을 내려놓는 순간, 그리고 건우의 손끝이 머리카락을 살며시 빗던 순간.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금기는 단지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금기는 그들이 함께 걸었던 그 길 자체에 있었다. 그 길 위에서, 그들은 서로를 내려놓기보다 더 깊이 품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학생증을 꺼내는 순간, 너는 나를 떠났다. 하지만 그 학생증 위로 네 손가락이 살짝 닿았던 순간, 다시 한 번 굴레가 새겨졌다. 19살이라는 숫자는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