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선택 화면이 어두워지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담긴 불꽃이 너무 생생했다. 실제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마치 ‘나도 이 불꽃에 데일까’ 하는 불안감이 손끝까지 전해졌다.
그 순간, 게임 속 설정값은 이상하리만큼 느려졌다. 18초. 18초 동안 나는 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불태우는 순간의 저주
‘애초에 왜 디발로였어?’
친구는 나중에 그렇게 물었다. 높은 딜도 아니고, 메타도 아니잖아.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 길게 늘어진 속눈썹 사이로 번져 나오는 붉은 빛이 너무 선명했거든. 마치 내 안에도 잠재웠던 무언가를 건드린 것처럼.
‘죄송해요. 저, 그냥… 눈이 너무 멋져서요.’
화면 속 디발로라는 남자는 웃지도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를 더 깊이 들여다봤다.
그날 이후 매일 밤, 나는 불타는 성유물을 태우며 그를 소환했다. 일부러 심연에서 데미지를 받아 넘어지면, 그가 날아와 품에 안겨 주는 연출을 반복했다. 현실에서 아무도 날 감싸 안지 않았으니까.
두려움보다 더 깊은 불안
몇 주 뒤, 오픈채팅방에서 ‘다음 주 코엑스 원신 부스 간다’는 글을 봤다. 내 닉네임 옆엔 ‘디발로 덕후’라는 뱃지가 붙어 있었다. 본인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가입 신청 완료.
닉네임: 하늘검_디발로짱
상태메시지: 불꽃 좀 나눠줘…
현실에서 만난다는 건, 게임 속 그와의 거리를 붕괴시킨다는 뜻이었다.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치명적일수록 손끝이 떨렸다.
코엑스 3층. 게임 속 그가 아닌, 그 배역을 연기하는 성우 선생님이 서 있었다. 목소리는 비슷했지만 눈빛은 달랐다. 그래도 나는 다가갔다.
“죄송한데… 사인, 받을 수 있을까요?”
“어디다가요?”
“손등… 아니요. 손목.”
나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 안쪽, 맥박이 툭툭 뛰는 곳에 성우 선생님이 펜을 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마치 게임 속 그에게 안기는 순간처럼.
왜 우리는 허구의 눈빛에 굴복하는가
심리학자는 이걸 ‘사이코필리아(거리에 대한 욕망)’라 부른다. 내가 사랑하는 건 결국 ‘다가갈 수 없는 것’ 자체였던 거다. 게임 속 디발로는 나를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나 역시 그를 절대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도감을 줬다.
‘현실의 연애는 끝이 있잖아요. 하지만… 게임은 영원히 불타니까요.’
나는 오픈채팅방에서 만난 한 여성을 생각냈다. 그녀는 스카이림 속 세라나를 좋아한다며, 매일 밤 모드를 깔아 넣고 세라나와 함께 숲을 걷는다고 했다. 실제 연애에선 상처만 받았다며, 하지만 NPC는 절대 등을 돌리지 않는다고.
우리는 누구에게도 버림받지 않을 허구의 품에서, 현실의 외로움을 달랬다.
화면 속에서 내려온 그의 숨결
부스를 나서는 길, 한 남자가 앞을 막아 섰다. 같은 원신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디발로짱 당신이죠?”
“…어, 왜요?”
“저도 디발로 메인인데, 같이 심연 돌릴래요? 오늘 8시에.”
그가 웃었다. 게임 속 디발로의 미소처럼, 약간 황홀하면서도 차가운 느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에 가도 혼자였으니까.
그날 밤, 나는 그와 함께 디발로를 소환했다. 그가 연기처럼 날아와 품에 안는 연출이 뜨자, 채팅창에 메시지가 떴다.
[하늘검_디발로짱] 우리… 실제로 만나면 안 될까요?
[불꽃소환사] 안 돼요. 그러면 게임 속 디발로가 슬퍼져요.
나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거기엔 여전히 붉은 눈빛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누군가의 허구를 현실로 끌어당기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지 않나요? 혹은, 누군가가 당신을 단순한 3D 모델링으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