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다 주문해도 될까요?”
아린은 메뉴판을 뒤적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삼겹살 2인분에 공기밥 추가, 계란찜, 된장찌개. 37,800원. 내 잔고는 42,000원. 한 모금의 숨을 삼켰을 뿐이다.
그녀의 팔목엔 오메가 시마스터가 빛났고, 발엔 구찌 로퍼가 두꺼운 양말 위에서도 80만 원의 무게를 뽐냈다. 나는 여전히 통장 잔고를 머릿속에 띄워놓고 데이트했다. 우리가 처음 마주친 곳은 대학 국제대학원 라운지. 그녀는 스위스 유학 복학생, 나는 등록금 떼느라 아르바이트 중인 인턴이었다. 세상은 이미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낮은 탁자, 낮은 자존감
포장마차 2층 끝자리. 아린이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여기... 내가 어릴 때 아빠 따라온 곳이야. 손수건 닦아주며 짜장면 먹던 기억이 나네.
거짓말. 그녀의 아버지는 이태원 빌딩 한 채를 통째로 소유한 부동산 재벌이다. 그녀는 내가 위안 삼을 수 있도록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무대로 내려와줬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건 감사가 아니었다. 자기 얼마나 착해. 내가 얼마나 초라해.
그때 아린의 손이 테이블 아래로 살짝 내려왔다. 난방이 안 닿는 콘크리트 바닥 위로. 손등이 내 무릎을 스쳤다. 차가웠다가 뜨거워졌다가 다시 식었다. 3초도 채 되지 않은 접촉. 그러나 그 3초 만에 우리는 서로의 계층을 확인했다.
테이블 아래, 42,000원이 타버리는 소리
아린의 손가락이 내 종아리를 타고 3cm 올라갔다. 너무 느린 속도라 숨을 죽이고 지켜봐야만 느낄 수 있었다. 손끝 하나가 내 살갗 위를 미끄러지며 올라가는 동안, 나는 42,000원이 녹아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괜찮아?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는 내가 42,000원짜리 한도를 초과할까 봐 긴장했음을, 나는 그녀가 42,000원으로 사는 나를 걱정하는지 아니면 연민하는지를. 손끝이 내 무릎 위에 닿았을 때, 나는 그녀의 손목 위 시계가 2천만 원이 넘는다는 걸 떠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4만 원의 심연
준호, 29살, 광고회사 AE. 인스타그램에서 만난 ‘율’과 강남 와인바. 율은 대기업 총수 일가, 가방은 버킨, 시계는 롤렉스 데이토나. 와인 한 병 28만 원. 준호는 그날따라 카드를 두고 왔다고 거짓말했다.
내가 술래. 너는 그냥 마셔.
율은 잔을 들며 웃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계산을 피하는 이유를. 그녀는 오히려 120만 원짜리 샴페인을 시켰다. 준호의 손이 떨렸다. 그날 밤, 그는 화장실에서 구토하듯 메시지를 썼다.
미안. 다음엔 내가 더 좋은 곳으로...
율은 답장 없이 나갔다. 발렌티노 하이힐은 결코 그의 카드 한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Tinder 프로필에 ‘건전한 소비’라고 적었다. 아무도 그 속뜻을 묻지 않았다.
계층의 냄새
우리는 왜 상대의 재력에 연연할까. 이건 단순한 자존심이 아니다. 그녀는 평생 내가 벌 수도 없는 돈을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 앞에서 무력했다.
사실 더 어두운 욕망이 있다. 우리는 부자에게서 관대함을 기대한다. 그들이 써주길 바란다. 그들이 우리를 ‘빚’에 올려놓길 원한다. 그럼 우리는 그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다. “너 때문에 나 이 정도 썼잖아”라고, 미묘한 채권.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비싼 와인을 시킨다. 더 사치스러운 곳으로 끌고 간다. 너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질 수밖에 없어. 그때 우리는 드러낸다. 자기애의 저편, 초라한 욕망.
당신도 한 번쯤 겪었을 것이다
지갑을 열 때마다 상대의 눈빛을 확인했다. 그들이 우리의 재력을 가늠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우리는 가난을 숨기려 더 비싼 곳으로 끌고 갔다. 혹은 반대로, 너무 싼 곳으로 끌고 가며 나도 너처럼 부자가 아니야라고 선언했다.
그날 밤, 아린은 내가 계산하는 걸 보고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참았다. 우리는 이미 서로의 계층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계산한 42,000원을 아는 상태였다. 그녀는 그걸로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로 그녀를 지배하려 했다.
너는 그날 밤, 무엇을 숨기려 했나
사실은 내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너보다 더 부자일 수도 있다는 걸. 당신은 한 번쯤 이렇게 말해본 적 있나. 아니면 나는 돈 때문에 널 만나는 게 아니라라고 했던가. 우리는 돈 앞에서 진실을 숨기고, 그 숨김으로 사랑을 망쳤다.
그날 밤, 우리는 각자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정작 사랑은 그 자존심의 틈에서 새어 나왔다. 너는 아직도 그 틈 속에 숨어 있나? 아니면 이미 그 틈을 메우고 돌아섰나.
너는 오늘도, 누군가를 만날 때 계좌 잔고를 확인하는가?
우리는 서로의 지갑 두께만큼 깊이 침범했다
그날 밤, 아린의 손끝이 내 종아리를 타고 3cm 올라가는 동안, 나는 42,000원이 녹아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지갑 두께만큼 깊이 침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