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포도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나는 그냥 남자들이 체육관에서 땀 냄새 풍기며 덤비는 건 싫어.” 찬장 안에 있던 나의 첫 번째 반응은 ‘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였다. 그런데 동시에 머릿속 어딘가가 지글거렸다. 그러면 내가 하지 말라는 건가. 바로 그 지점이 문제였다. 금지된 방향으로 뱀 한 마리가 살금살금 기어올라 해열이 올랐다.
그녀의 거절이 지닌 뜨거운 향기
나는 늘 그랬다. 여자친구가 “이건 너무 가부장적이야”라고 툭 던질 때마다, 허리 아래쪽이 먼저 반응했다. 뇌는 부끄러움에 화끈 달아올랐지만, 혈액은 도발의 반대편으로 흘렀다. 그녀의 지적이 날카로울수록, 나는 더더욱 그 칼날에 살을 붙이고 싶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밑으로 가라앉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내 귓속에서 울릴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굳어진다. 굳은 곳은 바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경계석이자, 동시에 그 경계를 넘고 싶은 발목의 떨림.
사례 1: 준영이의 ‘노’는 도발이었다
준영은 스무 살 때 캠퍼스 문화제에서 ‘젠더 프리 마켓’ 부스를 지키던 유진을 처음 봤다. 그녀는 머리에 파랑·초록 물감을 칠하고, “남성만이 고통받는 사회는 없다”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준영이 다가가 “저도 동의합니다”라고 말하자, 유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가 무슨 얘길 하려고 그래?
준영은 말했다.
진짜로요. 저도 여성 혐오에 반대하고…
유진이 잘라 말했다.
반대만 하면 뭐 해. 행동은 안 하잖아.
그날 이후로 준영은 유진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수백 번 들락거렸다. 유진이 올린 ‘오늘도 남자 과잉이었다’라는 하루 기록을 볼 때마다, 준영은 손에 든 맥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들이켰다. 그녀가 말한 ‘남자 과잉’이 자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화끈했다. 이상했다. 그녀가 자신을 혐오한다고 느껴질수록, 준영은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사례 2: 지훈이가 간직한 ‘네’ 앞의 긴 여정
지훈은 서른다섯,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여자친구 수진은 연차도 모르고 일하다가 어깨 빠질 뻔했을 때 직장 내 성폭력 상담소에 뛰어들어갔다. “너무 지친다”고 말하는 수진의 눈이 초점 없이 흔들릴 때, 지훈은 허겁지겁 밥을 씹다 말고 말했다.
그럼 우리… 좀 쉬자. 나도 곧 휴가 내고.
수진은 벌컥 소주를 넘기며 대답했다.
휴가? 남자들은 휴가가 해결책인 줄 알아.
그날 밤, 지훈은 혼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왜 내가 미안해지지? 그리고 왜 이 미안함이 이렇게 뜨거워? 수진은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레 다가가 손가락으로 수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한참 만에 수진이 살짝 눈을 떴을 때, 지훈은 그 눈빛 속에서 ‘노’를 읽었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은 아니야’였다. 그 순간, 지훈의 몸은 축 늘어졌지만 속은 들끓었다.
그녀의 ‘노’는 나를 발가벗긴다. 죄책감과 흥분이 동시에 손을 잡고 내려와, 나는 그 손목을 물고 싶어진다.
금기와 욕망의 거울
우리는 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철벽 앞에서 더 뜨거워질까. 정답은 간단하다. 금기는 욕망의 가장 치명적인 연료다. 페미니즘이라는 담론은 남자들에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이전까지는 그랬을지도 모른다’라는 뉘앙스를 남자들은 놓치지 않는다.
그래, 나는 예전엔 그랬을지도 몰라. 그럼 지금 다르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자기 확인일지도 모른다. 그 힘을 쓰지 않겠다는 선택이 곧 힘이라는 착각으로 변질될 때, 남자는 스스로를 ‘양심적 권력자’로 격상시킨다. 그리고 그 격상은 또 다른 흥분을 낳는다.
거울 속의 나에게
오늘도 누군가는 페미니즘을 읽으며 ‘나도 바뀌어야지’라고 다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깊은 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나를 원하는 건 아닐까. 그녀가 ‘네’라고 말하는 날, 나는 과연 여전히 뜨거울까. 아니면 ‘노’였기에 뜨거웠던 것일까.
당신은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면서도, 누군가에게 금지되는 상상 속으로 발을 담그고 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