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없으면 나도 못 산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지난 겨울,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날에도 연인의 집으로 달려갔다. 시신이 식장에서 얼어 가는 동안, 나는 그의 침대에서 몸을 데웠다. 차라리 얼어 죽었어야 했나.
너와 나,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따로 있다. 나는 그 시기를 이미 지나쳤다. 10년. 무려 10년 동안 ‘우리’라는 말에 목을 매달았다.
그사이 모든 걸 내려놨다.
-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장례식 날 문자 한 통 없었다.
- 어머니는 나와 절연을 선언했다. “그 애와 결혼만 하면 다시는 볼 일 없다.”
- 동생은 연락을 끊었다. 카톡 프로필 사진은 가족 사진 그대로인데, 내 얼굴만 지웠다.
그래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그가 있으니까.
10년을 기다린 눈빛, 그 한 방울 차가움
202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난방이 고장 난 원룸에 둘이서 숨죽여 있었다.
나: “내년엔 진짜 결혼하자.”
그: “…”
나: “다들 등 돌렸지만, 너만 있으면 돼.”
그: “…실은.”
그가 말했다. 진짜 말했다.
“나도 너 없이는 못 살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냥… 미안하다.”
그래, 고작 미안했다니.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유를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차가운 손을 내밀었다. 청첩장이었다. 예식장 이름도 모르는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욕망의 실루엣, 어둠 속에서 떠오르다
내가 버린 건 가족이었다. 그사이 그는 가족을 얻었다.
왜 그런지 아는가? 가장 뜨거운 장소가 식어버릴 때, 우리는 차가운 곳에 불을 지르고 싶어진다. 가족이라는 뜨거운 이름을 끊고 나니, 나는 더 핫한 사랑을 원했다. 그리고 그 욕망은 나를 태워서, 결국엔 내 손가락마저 재로 만들었다.
그가 원한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이었다. 10년을 씩씩거리며 “나 없이는 못 산다”고 외쳤건만, 그는 조용히 살아남았다.
두 개의 이혼, 한 명의 생존자
사례 1. ‘수진’
서울 모란역 앞 술집. 수진은 부모의 30주년 결혼기념일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남자친구 민재와의 2박 3일 제주 여행 때문이었다.
돌아와 보니 가족은 이미 ‘옛 가족’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네가 아닌, 민재가 장남이 되는 게 어떠냐.”
어머니: “우리 집 담벼락에 너 사진은 없앴어.”
1년 후, 민재는 회사 동아리 후배와 혼인신고를 했다. 수진은 그 날 밤 모란역 화장실에서 혼자 입을 꼭 다물고 울었다.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버린 가족은 이미 돌아올 수 없었고, 민재는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사례 2. ‘도현’
대전 둔산동, 고시원 205호. 도현은 형과 맞먹을 만큼 커다란 집을 포기하고, 7년 연인 ‘지아’와의 신혼집 계약금만 꿈꾸었다.
그러나 지아는 결국 “가족을 속이고 사는 건 너무 무겁다”며 등을 돌렸다. 도현은 가족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문 앞에 놓인 쓰레기봉투만 덩그러니 있었다. 안에는 7년 전, 형이 선물해 줬던 청개구리 인형이 들어 있었다. 종이에 붙은 메모:
네가 선택했잖아. 잘 살아.
도현은 그 봉투를 들고, 하루 종일 고시원 복도를 왔다 갔다 했다. 끝내 문 앞에 내려놓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금기를 품은 욕망의 화학식
가족은 최초의 욕망이자, 최후의 금기다. ‘내 편’이 아니라 ‘이미 내 몫’이라 믿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빈자리를 메울 새로운 ‘절대적인 사랑’을 찾아 나선다. 그게 바로 10년 연인, 혹은 평생의 배필일 거라 착각하는 순간.
심리학자 슬로터다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타자를 상실할 때 비로소 자신의 ‘필요’를 절실히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를 채우려는 게 아니라, 필요 없음을 증명하려고 헌신한다. 결국 가족을 버리고, 연인에게 매달리는 건 사랑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필요 없어질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는 공포 때문이다.
문이 닫히면, 방은 언제나 추워진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누구에게 등 돌렸는가.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서 발길을 돌릴지 아는가.
내가 버린 가족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내민 청첩장도 다시는 접히지 않을 종이처럼.
결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데, 누군가는 시작도 끝도 없이 서성인다. 그게 너인가, 나인가.
문이 닫히면, 누가 문 앞에서 울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