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잔소리
밤 11시 47분, 홍대 앞 술집 테라스. 동석이가 새로 연극한다며 티켓을 내밀자 내 폰이 울렸다.
—어디야? —동석이랑 술 한잔만— —그럴래? 그래도 내 전화는 받는구나.
나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석이 얼굴이 굳는 걸 보며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 했다. 그날 이후 동석이 연락은 끊어졌고, 단톡방에서도 퇴장했다.
네가 먼저 날 버렸어
처음엔 방어였다. "그 애들은 너를 방해해, 우리 사이를 깎아내리지." 그녀가 속삭일 때마다 나는 친구들의 결점만 더 또렷이 보았다. 재훈이는 결국 다시 여자 문제로 널 괴롭히겠지. 수진이는 네가 나를 만난 걸 질투해.
하나둘 연락이 끊겼다. 학창 시절 눈 녹듯 사라진 스무 명이 넘는 이름들. "나도 너만 남았다"는 말이, 실은 그녀의 전리품 목록이었다.
그녀는 자르는 손놀림이 익숙했다. 어느새 내가 칼을 들고 있는 줄도 모르게.
지갑 속 고립
2021년 11월. 정우는 회식 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다가 그녀에게 사진 한 장을 받았다.
—너랑 찍은 거 왜 올려? 지워. —아니, 그냥 단체샷인데— —지금 당장.
사진은 지워졌고, 정우도 지워졌다. 나는 정우에게 “그냥 잠시 좀 멀어지자”고 말했지만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사임계였다. 정우는 결국 결혼식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지갑을 열어 보여줬다. 내 신용카드, 체크카드, 청약저축, 모든 것. “이제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했지만, 그 말은 곧 “이제 너는 혼자뿐이야”였다.
왜 우리는 타오르는 가시를 품는가
사회학자 밀그램의 ‘가학적 충동’ 실험은 사람들이 충격을 가하도록 지시받으면 본성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혹은 누군가와 함께라는 이름으로 잔혹함이 정당화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녀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제거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결코 홀로가 아니었고, 그래서 더 강해졌다고 믿었다.
누군가를 위해 남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홍위병이 된다.
그녀의 떠난 밤
2023년 3월 14일, 화이트데이. 그녀는 짐을 싸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낯선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누군가와 긴 시간을 함께한 흔적이었다.
—너도 이제 친구 없잖아. 나랑 같이 시작하자. —…누구랑? —그냥, 누군가.
그 말이 전부였다. 그날 이후 그녀는 사라졌고, 나는 아무도 부를 수 없었다. 단톡방은 텅 비었고, 전화번호부는 점점 희미해졌다.
내가 지켜야 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내 친구들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마지막 질문
칼을 품에 안고 사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살점을 베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누구를 위해 칼을 높이 들고 있는가, 그리고 그 칼날이 돌아올 때 너는 누구에게로 달려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