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서 숨이 닿는다. 향기로운 와인 향이 침대 시트에 배어, 그의 숨결과 뒤엉킨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 민재를 바라본다. 눈동자 속 내 모습은, 놀랍도록 차분해 보인다.
“오늘은 끝까지 머물러 줘.”
그는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민재의 머리카락을 한올 움켜쥔다. 실제로는 한올도 움켜쥐지 못했다. 이미 그 모든 것이 허공에 떠버린 뒤였으니까.
첫 맛을 기억하는가.
한참 전, 술집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다. 미처 걸레질하지 못한 물기 위로 우리의 발이 닿았고, 술이 덜 익은 탓인지 손끝이 시려웠다. 그는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신발이 젖었네. 얼른 말려.”
그 순간, 내 손등에 닿은 그의 체온은 지금 기억해도 뜨겁다. 사랑은 처음부터 온도였다.
달콤한 배신이 시작된 건 어느 날이었을까. 휴대폰 속 ‘혜진’이라는 이름은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낸 메시지들은 차츰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흘렀다.
‘민재야, 오늘도 네가 써준 멜로디 들으며 잘 거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민재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때 이미 속으로는 무언가가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증오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달콤한 감정. 혀끝에서 사르르 녹는 초콜릿처럼, 느리게, 그러나 끝없이 달콤했다.
계획은 실은 단순했다.
제주도, 바닷가 펜션. 민재는 내가 제안한 여행에 기뻐했다. 그는 새벽까지 작곡하느라 지쳐 있었다. 와인 한 모금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도 잠시, 그는 내 품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으며 속삭였다.
“자, 내가 여기 있어.”
그날 밤,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 속 민재의 세계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반주곡, 가사, 데모 파일들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 숨을 멈췄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 민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3초의 욕망
나는 커서를 드래그했다. Ctrl+A. 모든 파일이 하늘색으로 반전됐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실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민재는 옆에서 곤히 잠든 채, 한 손이 이마 위로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 있었다.
드래그. 휴지통 아이콘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반짝였다. 1초. 손가락을 떼면 그의 5년이 사라진다. 2초. 민재는 혜진에게 써준 멜로디도 잃고, 우리의 첫 키스 밤에 썼던 가사도 잃는다. 3초.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그저 3초를 온몸으로 빨아들였다. 뜨거운 아드레날린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이 순간, 나는 민재의 모든 것을 주무를 수 있는 신이었다.
결국 나는 파일들을 놓지 않았다. 휴지통으로 옮기는 대신, 숨겨둔 USB에 몽땅 복사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삭제. 휴지통이 비워지는 효과음이 방 안에 울렸다. 민재는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마음
나는 민재의 집으로 돌아왔다. 짐을 풀지도 않고 붉은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거울 속 나는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SNS에 한 장 올렸다.
이제 너도 나를 잊을 수 있겠지.
민재가 찾아온 건 사흘 뒤였다.
그는 초췌한 얼굴로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자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왜 그랬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에 작은 USB를 쥐어 주었다. 그 안에는 지워진 파일들이 복구된 채 들어 있었다. 민재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그래, 복수는 끝났어. 너도 나도 끝났지.”
우리는 왜 사랑하던 사람을 파괴하고 싶을까.
사랑은 뜨거웠다. 그래서 식어버린 자리에선 김이 서린다. 차가운 김은 손끝을 얼게 하고, 결국 마음을 얼려버린다. 증오는 사랑의 유리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뜨겁고 차가운, 그 반대편 이중성.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릴 때, 그것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파괴함으로써.
거울 속의 낯선 눈빛
나는 이제 민재를 볼 수 없다. 그를 증오하는 순간, 나는 더는 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민재를 만난 첫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증오는 나를 사로잡았다.
나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어. 나를 잃고 싶지 않았어.
결국 남는 것
나는 민재에게 연락했다. 한참이 지나서.
미안해.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할 수 없어. 그래서 널 미워하게 됐어. 그게 나였어.
민재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걸.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곳, 그것이 연애의 끝이라는 걸.
문을 닫는 소리
당신도 한 번쯤 그런 적 있지 않나. 사랑하던 사람을 향해 칼날 같은 말을 던지고 싶은 밤. 그런 욕망이 피어오르면, 당신은 누구의 모습을 보게 되는가. 그리고 그 모습이 당신의 얼굴인가.
나는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누군가는, 어쩌면 앞으로도 내 안에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