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을게. 지금 당장.
문 앞에 선 지안의 손이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있었다. 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녀의 눈동자는 반쯤 뒤집혀 있었다. 열쇠는 아직 내 손에 꽂혀 있었다.
이게 진짜로 원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술이야?
어쩌면 나조차 구분이 안 가
누가 더 취했는지 모르는 순간
술은 욕망의 필터를 벗긴다. 그러나 동시에 책임의 필터도 벗긴다. ‘취했으니까 실수’라는 말로 상황을 가볍게 흘려버리지만, 그 이면에는 잔인한 계산이 도사리고 있다.
‘당신이 나를 거절하면, 나는 내일 아침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 책임도 없을 거야.’
그녀의 눈빛이 말했다. 자, 네가 결정해. 동시에 나에게도 은밀한 유혹이 열렸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나만의 무게를 지워버릴 수 있지 않을까.’
문 앞의 두 남녀
“그녀는 내가 데려다준 집 현관에서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이마를 내 가슴에 부딪쳤어. ‘오늘은 안 들어가도 돼’ 그러면서. 제가 손을 떼자 ‘겁쟁이’라고 웃었죠. 그래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침 눈 뜨니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어요. 차갑고, 부끄러워하고, ‘내가 먼저 들어온 거 맞냐’고 묻더군요.”
“전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제가 회식 끝에 취해서 집에 왔는데, 그날따라 달달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유혹했죠. 근데 그가 ‘너 지금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것 같아’ 하고 등 돌리고 잤어요. 다음 날 아침 보니 침대 끝에서 떨고 있더라고요. 왜 그랬냐고 물으니 ‘내가 싫은 거냐’고 오해할까 봐 손대지 못했다더라고요. 그때 그가 조금만 끌어안아줬어도, 우리가 끝나진 않았을 거야.”
술에 담긴 두 가지 진실
술은 우리를 두 명의 인물로 만든다. 하나는 과거의 상처를 술에 씻어 내려는 아이. 다른 하나는 그 아이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어른.
우리가 진짜로 끌리는 건 ‘취해 있는 그녀’ 자체가 아니다. 그건 결정권을 내게 넘긴 채 책임을 피하려는 상대에 대한 은밀한 권력감이다.
내가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
나는 결국 지안의 손을 멈췄다. 그러나 그 순간 느낀 건 자부심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가슴이 텅 빈 듯했다.
거절은 책임의 전가였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는 안도감. 하지만 그 안도감 뒤에선 ‘나는 원래도 하지 못했던 거다’라는 자괴감이 스며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휴대폰
지안은 아침 문자를 보냈다.
[지안] 어젠... 괜찮았어?
[나] 응, 괜찮아. 그냥 재워줬어.
[지안] 아... 미안. 그래도 고마워.
두 줄의 문자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공허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거절은 지안을 지킨 게 아니라, 나를 지켰을 뿐이다.
그날 밤, 나는 문고리를 놓지 못했다.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켰고, 복도 끝의 형광등이 지글거리며 꺼졌다가 켜졌다. 손에 든 열쇠는 차가워서 손바닥에 자국이 남았다.
지안은 이불 속에서 한 발짝 물러나 누워 있었다. 숨소리는 깊고 규칙적이었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은 내 손은 떨렸다. 문을 닫으면 그녀는 안전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문 밖에 서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문고리를 놓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그 복도가 꿈에 나온다. 문고리를 놓지 못한 채, 새벽 세 시의 형광등 소리를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