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방 속 첫 문장
[10:14 PM] 준혁: 너는 지금 뭘 입고 있어?
수진은 침대 끝에 앉아 긴 팔 티 한 장만 걸친 자신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잠시 멈췄다. 카메라는 켜져 있지 않았지만, 그의 물음은 이미 창밖 어둠을 스며들 듯 방 전체를 삼켰다. 한참 만에 입력창에 ‘맨 얼굴’이라고 적고 엔터를 눌렀더니, 상대방은 ‘나도’라고 답했다. 그날 이후 180일, 둘은 아직 단 한 번도 ‘맨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욕망이 지루해지는 순서
화면 너머에선 모든 감각이 거꾸로 작동한다. 손끝이 아닌 말끝으로 피부를 간지럽히고, 목소리 대신 이모티콘이 떨린다. 처음엔 그 미끄러움이 짜릿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사이, 너와 나만의 문장이 눈덩이처럼 굴러가며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어느 날, 수진은 문득 걸음을 떼지 못했다. ‘오늘 만나자’는 말이 입안에 차올랐다가도, 만나면 뭐해 라는 차가운 물음이 먼저 식어 버렸다. 준혁 역시 열흘에 한 번쯤 ‘그래도 너랑 진짜 눈 맞으면 좋을 것 같아’를 던지다가, 이내 ‘나 오늘 갑자기 회식’을 핑계 삼았다.
그들은 이미 서로의 텍스트판 상상에 능숙해졌다. 실제 피부는 거칠 수 있고, 숨결이 밀릴 수 있으며, 말투가 어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지루해진 게 아니라, 지루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커진 것이다.
두 개의 방, 하나의 거울
카페 루프탑, 어느 토요일 오후 2시.
채원은 미리 도착해 텅 빈 테이블에 앉았다. 6개월 전 이상형 월드컵 채팅방에서 ‘옆동네 94년생’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남자와 처음으로 ‘만나자’는 말이 오갔던 날이었다. 그러나 그날도, 지난주 오후도, 다다음주 예정이던 날도 모두 취소됐다. 이유는 비슷했다. ‘아직 머리 안 감음’, ‘갑자기 부모님 오심’, ‘비 올 것 같아서’.
채원은 취소 문자를 보내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내가 왜 이래? 그녀는 그가 보낸 사진 속 살짝 드러난 어깨 근육, 은근히 올라간 눈매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실제 모습이 그 상에 끼워지는 순간, 현실감보다는 실망감이 먼저 올 것 같아 두려웠다.
그녀는 왜 발을 뺐나
서울역, 밤 11시 반.
혜지는 기차를 놓쳤다. 도착 플랫폼에서 2시간 뒤 기차로 바꾸고 나니, 먼저 와 있겠다던 그와의 첫 만남이 하루 뒤로 밀렸다. 혜지는 대합실 의자에 앉아 ‘지금 나가면 너랑 맥주 한 잔 마실 수 있을 뻔’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답장이 오지 않았다. 30분 뒤 그는 ‘지금 만나면 인상 깎일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그날 밤, 혜지는 플랫폼 투명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봤다. 나는 도대체 누굴 좋아하고 있었을까. 화면 속 그의 목소리, ‘첫눈에 반했다’는 메시지 127개, 그리고 두 손으로 쥐어짜낸 화면 키스 이모티콘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그 모든 게 실제로 부딪히면 단번에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굳이 기차를 택했다. 미뤄진 시간, 미뤄진 육체, 미뤄진 진실이 모여 ‘우리’를 아직 깨지지 않게 붙들어 두었다.
금기를 유지하는 이유
우리는 DM 속 상대를 실제로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질렸기 때문’이라고 속삭이지만, 사실은 반대다. 질리지 않으려고 서로를 멀찍이 두는 것이다. 화면은 거대한 보호막이 되어, 나의 결점, 너의 결점을 동시에 지우거나 부풀릴 수 있는 유리창이 되어준다.
심리학자 아비타트론은 이런 현상을 ‘디지털 거울 단계’라 부른다. 우리는 상대를 마주치기 전에 우선 그를 나의 욕망이 가장 잘 투영되는 스크린으로 만든다. 그 스크린에 비친 나는 완벽하고, 상대 또한 완벽하다. 만약 스크린을 걷어내면—즉, 실제로 만나면—이중 노출된 사진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은 피곤해서’, ‘비가 와서’, ‘갑자기 일이 생겨서’를 반복한다. 그 모든 핑계는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우리를 망치지 말자.
만나지 못한 너, 만나고 싶지 않은 나
180일째, 수진은 준혁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02:07 AM] 수진: 나 지금 너랑 만나면 너랑 나 둘 다 망할 것 같아.
화면은 곧장 ‘읽음’으로 바뀌었다가, 5분 뒤 ‘준혁이 입력 중…’이 떴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수진은 전화기를 뒤집어 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거리 가로등 아래 지나가는 커플의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꼭 잡았고, 여자는 고개를 기울여 웃었다. 그들은 두 사람 모두의 결점을 알면서도 거기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나를 만나고 싶어? 아니면, 만나지 못하게 만들어 둔 나를 계속 끌어안고 싶어?
화면은 이내 꺼졌다. 아직 180일이 더 지나도, 360일이 흘러도 ‘우리는 언제 만나지?’라는 질문 대신, 서로 조용히 만나지 못할 이유를 추가해갈 테다.
당신도 누군가와 6개월, 혹은 600일째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물어보세요. 나는 도대체 그 사람의 얼굴을 원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