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는 당신이 다 그랬잖아요."
예린이 식탁 끝에 고개를 숙일 때, 열다섯 살의 목소리는 아직 젖내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로 내 몸의 핏줄이 터졌다. 아내의 바람을 참으며 살아온 이유가, 결국 이 아이 하나였다는 착각이.
엄마가 웃고 있어. 아빠 옆이 아니라, 삼촌 옆에 서서.
이혼 소송 내내 예린은 법정 구석에 작은 쥐처럼 웅크려 있었다. 판사가 물었다. "어머니와 계속 지낼 의향이?"
예린은 창밖을 보았다. 내가 서 있는 쪽이 아니라, 전처와 그 남자가 앉아 있는 쪽으로. 그리고 뱉었다.
"네, 엄마랑 살고 싶어요."
내 딸이었다. 내 피를 나눈 아이가, 전처의 편에 섰다. 그날 이후 나는 예린이란 이름을 입에서 씹어 삼켰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마저 들렸다.
십 년이 흘렀다.
스물다섯, 예린은 지하 주차장의 형광등 아래에 서 있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녀의 숨결은 아직도 내 귀에 닿는 거리였다. 열쇠를 쥔 내 손등이 차가워졌다.
"아빠..."
병원 진단서가 그녀의 손에 떨렸다. 유방에 덩어리가 잡혔다고 했다. 엄마는 새 가족과 해외로 떠났고, 삼촌—아니, 그 남자—는 연락이 끊겼다고.
"돈이... 필요해요. 수술비가..."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이가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 십 년 전 내가 흘렸던 것과 똑같이 차갑고 짜란했다. 나는 그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아이는 나를 버렸다. 지금도 그 손 안에 내 피를 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남자가 있었다. 김현수, 쉰둘.
그는 퇴근길에 딸 민서의 전화를 받았다. 민서는 아버지를 버렸던 아내 편에 붙었던 아이였다. 지금은 남편에게서 맞으며 산다고 했다.
"아빠가 그때 나 좀 데려갔더라면..."
현수는 끊었다. 다음날, 병원 민원실에 갔다. 민서의 진료비를 대신 내줄 수 있는지.
담당자가 물었다. "가족관계증명서 상으로는 딸이 아닌데요?"
"그래도... 혈육이잖아요."
바로 그 말이, 십 년 전 민서가 했던 말이었다. 아빠, 혈육이잖아요. 엄마 편 들어야 해요.
질투와 연민은 쌍둥이다. 배신당한 부모는 자식을 향해 두 갈래 욕망을 품는다. "네가 고통받기를"과 "내 품에 돌아오기를".
심리학자 앨리스 밀러는 말했다. "부모는 자녀의 배신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러나 자녀 역시 그 배신을 결코 잊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를 파먹는다. 피를, 살을, 뼈를. 그리고 다시 피를, 살을, 뼈를.
오늘 밤, 당신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본다. 아이가 울며 달려오는 상상—그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아니면 차갑게 돌아설까, 아니면 그 손을 잡아서 다시 한 번 물려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