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너랑 나는 이제 동전의 양면 아닌 거야?”
오후 3시 42분. 혜진은 카톡방 ‘19기 전탐친’의 멤버 목록을 쓱 내려갔다 택시를 기다리듯 눈을 떼지 못했다. 127명. 그녀와 태환과, 그리고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125명. 남아 있는 마지막 연결고리. 지우면 끝이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가 남긴 반지 자국은 지워도 손가락 뼈에 남는다
태환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단지 혜진의 19번째 생일날, 운동장 뒤편 담벼락에 걸터앉아 "우리, 스무 살 되면 달라질까?"라고 물었을 뿐. 혜진은 그때 흘긋 웃으며 대답했다. "변하면 죽는 거지."
그리고 361일 뒤, 태환은 단 한 마디도 없이 혜진의 답장 없는 실루엣을 지웠다. 연락두절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혜진이 아닌, 자신이 먼저 마음속에서 혜진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숱하게 보던 영화 장면처럼, 한 프레임씩 지우듯.
숨을 쉬듯 서로를 지웠던 밤
내가 너를 떠난 건 아니야. 네가 들어왔던 문을 나가기만 한 거야.
미래대 2학년 수진은 매일 밤 2시 17분이 되면 자동으로 눈이 번쩍 떠졌다. 전 남자친구 준호가 실시간 읽음표시를 확인하러 들어오던 시간. 수진은 4개월째 그 시간에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 안 읽음 표시는 푸른 불꽃처럼 화면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준호의 프로필 사진을 꾹 눌러 확대했다. 지난여름 함께 찍은 사진이 그대로였다. 수진은 준호의 콧날 끝을, 그리고 넥라인 아래 살짝 드러난 흉터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화면은 차가웠다.
2시 18분. 준호는 온라인 상태로 바뀌었다. 초록불이 켜졌다 꺼졌다 반복했다. 수진은 핸드폰을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준호의 손가락이 제 머리카락을 흩날릴 때의 무게감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 나를 지우고 있을까? 아니면 나를 다시, 뼛속까지 새기고 있을까?
네가 사라진 뒤, 나는 아직 네 눈동자에 살고 있다
혜진은 결국 127명의 방에서 나왔다. 퇴장 알림 메시지는 없었다. 그녀가 삭제한 건 방이 아니라 그들의 19년이라는 시간이었다. 태환도, 혜진도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를지도 몰랐다.
19살이라는 나이는 아프다. 성인이 되기 직전이라는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를 끝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가는 고통. 다시 말해, 19살의 이별은 서로를 끊는 게 아니라 서로를 죽이는 것이다. 한 사람의 미래를, 한 사람의 가능성을, 한 사람의 연약한 믿음을.
왜 우리는 죽이지 못한 채 헤어지는가
아직 아무도 죽이지 못한 19살은, 서로를 영원히 살려두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 그래서 우리는 섹스도 하고 키스도 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욕망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서로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 채, 우리는 미래에서 다시 부활할 자신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차단한다. 나간다. 지운다.
그러나 지운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다. 19살의 끊어짐은 늘 반쪽짜리다. 살아남은 반쪽은 끊어낸 이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숨죽이고, 끊긴 반쪽은 끊어진 이의 살결 속에서 영원히 숨을 쉰다.
너는 나를 지웠지만, 나는 너의 숨소리를 아직도 듣고 있다
혜진은 이제 24살이다. 그녀는 새로운 연인과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창밖으로 보이던 도시의 불빛은 마치 19살의 밤처럼 반짝였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태환의 숨소리가 들렸다. 끊겼다고 생각했던 실은 아직도 연결되어 있다.
혜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새로운 연인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손을 놓는 날, 나는 또다시 19살이 될까? 아니면 이번엔, 정말로 너를 죽일 수 있을까?
네가 나를 지웠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네 안에서 부활했다. 그러니까 이제 묻는다. 너는 정말로 나를 죽였는가? 아니면, 너는 나를 통해 네가 죽은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