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2시 37분, 예배실 뒤편 대기실
LED 조명이 하얀 벽에 십자가 그림자를 새김. 형진이 단추를 하나씩 채우며 나지막이 말한다.
"오늘은 네가 솔로 파트 맡는 거지?"
"응. 손이 떨려."
"왜?"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목덜미를 본다. 흰 셔츠 사이로 드러난 살결, 한 줌도 범접할 수 없을 것처럼 빛난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곳에 내 입술이 닿았던 날들을.
십자가 위의 우리
예배가 끝난 뒤 교회 앞 카페. 아내 지우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아메리카노를 우물거린다. 그녀는 여전히 성경 공부 모임에 나간다. 나는 아이스티를 홀짝이며 지난 새벽을 떠올린다.
"주일에도 만날까?"
"너무 위험하지 않아?"
"지우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때 나는 처음으로 ‘폴리’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다자 연애. 다자 관계. 다자.
죄. 두 글자가 심장을 찌르지만, 그 날카로움마저도 뜨겁다.
두 개의 침대, 세 개의 영혼
지우의 기도
밤 11시 23분. 우리 침실. 지우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제발, 하나님. 남편이 혼자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그녀는 내 우울증이라 믿는다. 나는 오후마다 호텔에서 형진과 예린을 만난다. 침대 시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을 때, 나는 죄책감보다 환희에 떨린다.
형진의 고백
같은 주일, 오후 3시 15분. 교회 뒷산 경당.
"나도 교인이야. 청년부 집사 맡고 있고."
"..."
"근데 너희 보고 있으면… 나도 이상해."
형진의 손에 든 찬송가 뒤편, 요한계시록 2:10이 새겨져 있다.
"네가 충성을 다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그는 면류관 대신 내 손을 잡는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본다. 신앙이라는 결백 너머의 어둠, 그것이 우리를 더 깊이 끌어당긴다.
금기 위에서
심리학자 윤석준은 『금기 욕망』에서 말한다. ‘종교적 엄격함은 금기의 공간을 작고, 뜨겁게 만든다.’ 나는 이 말을 읽으며 속으로 아멘을 외운다.
다자 연애는 교리와 거리가 멀지만, 그 거리만큼 욕망은 선명하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보혈. 그것이 우리의 죄를 씻어준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오히려 그 위에 누워 있는 우리를 상상한다.
믿음은 정복이 아니라 항복이라는 것을. 단, 항복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이 욕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지막 노크
예배실 문이 살짝 열린다. 지우가 들어선다. 나는 찬양 연습을 마치고 앉아 있다.
"오늘 저녁, 성경 공부에서… ‘사랑은 끝이 없다’는 말이 나왔어."
그녀의 말이 잘리지 않는다. 다만 우리 사이에 무언가 살아 움직인다. 십자가, 폴리, 금기, 용서—모두가 한순간에 겹쳐진다.
"너는 지금 이 십자가 아래에서, 누구의 손을 맞잡고 싶은가?"
그리고 그 손을 잡는 순간, 네가 빛이라 믿었던 것이 무엇이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