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에게 아무 감정도 없어.”
수진이 식탁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처 식지 않은 아메리카노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그녀의 눈동자를 살짝 흔들었다. 나는 아직도 왼손이 그녀의 오른손등 위에 살짝 닿아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피부는 7년 만에 처음으로 차가웠다. 따뜻할 때는 미지근했고, 차가울 때는 살점을 베는 듯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입을 열었지만, 속삭임은 목끝에서 뒤틀렸다.
‘지금이라도 그 손목을 잡고 흔들어, 네가 진짜 느끼는 걸 말해달라고 애걸할까.’
수진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흰 도자기가 윤기를 머금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아침 7시 23분, 창밖 햇살은 좋다." 그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내 몸은 거짓말을 한다. 너를 향한 뜨거움을 끝내 숨기지 못해.’
그 말이 식탁 위에 가라앉는 동안, 나는 아내가 속으로 삼킨 한 문장을 또렷이 들었다.
‘죄송해, 오늘도 몸이 기억해 버렸어.’
뜨거움을 숨기는 차가운 무기
6개월 전, 수진은 회식 자리에서 소주 한 잔도 받지 않았다. 클라이언트가 술을 권하면, 투명한 잔을 가볍게 밀치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 뒤로는, 눈동자 깊숙이 불씨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불씨를 알고 있다.
지난해 11월, 집에 늦게 돌아온 그녀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향수. 낯선 우드향이, 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은은하게 퍼졌다. 그날 이후 수진은 차가운 무기를 들었다.
‘남자에게 아무 감정 없다’는 한마디.
그 말 한마디면,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올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수진이 잠든 새벽 2시, 그녀는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켠다. 잠금 화면을 넘기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누군가에게 보내다 만 메시지가 몇 번이고 지워지고 다시 쓰인다.
‘차라리 내 몸이 굳어버렸으면 해. 그럼 네가 남긴 자국도 사라질 텐데.’
욕실 타일에 올려놓은 발끝
수진은 매일밤 욕실에서 40분씩 샤워를 한다. 문이 닫혀 있어도, 물소리가 멈춘 뒤 3분쯤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작고, 깊고, 남편이 들어서선 안 되는 목소리.
며칠 전, 나는 수진의 다이어리 한 페이지를 엿보았다.
‘4월 3일, 오늘도 샤워를 하며 다시는 몸을 떨지 않게 빌었다. 그러나 손끝이 가슴에 닿는 순간, 네가 남긴 입맞춤이 떠올라 버렸다.’
그날 밤, 나는 욕실 문밖에 서서 숨을 죽였다. 물소리가 멎고, 타일 위로 물방울이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흐느끼는 숨소리—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수진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고, 한 손은 아래로, 다른 한 손은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뜨거워지면 안 돼, 아직 남편이 집 안에 있어.’
침묵 위의 금기
"남자에게 아무 감정도 없어." 이 말은 나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선물한다. 첫째, 확실한 거리감. 둘째, 불가능한 욕망.
‘절대 내게 오지 마’라는 말은 ‘절대 내게 오지 못한다’는 금기와 동일한 힘을 지닌다.
금기 위에 손을 얹으면, 차가운 쇳덩이처럼 화끈거린다. 나는 수진이 그 말을 할 때, 속으로 무엇을 떠올렸는지 알고 싶다. 그녀가 아직도 누군가를 향해 불타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잿더미가 되었는지.
알고 싶지만, 묻지 못한다. 왜냐하면 수진은 지금, 뜨거운 욕망을 차가운 무시로 감추는 연습 중이기 때문이다.
얼음 속에선 불씨가 더 뜨겁게 살아남는다
수진은 방금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한다. 넥타이를 맬 때, 나는 그녀의 손등에 손가락 한 마디만큼 닿는다. 아직도 그곳은 따뜻하다. 단지 내 감각이 얼어붙은 것뿐이다.
‘나도 이제 너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고 말해버릴까.
그러나 나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수진의 체온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 뜨거움이 나를 향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그녀가 정말로 차가워졌다는 공포가 더 크다.
수진이 현관을 나서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손등을 잡았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손을 떼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방 안에 남은 뜨거운 향기.
나는 아직도 그녀의 체온을 느낀다. 얼음 속에선, 불씨가 가장 뜨겁게 살아남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