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눈동자에 박힌 검은 구멍: 당신이 숨기고 있는 얼굴

그녀는 내 앞에서 웃고 있는데, 시야에만 없다. 눈이 아닌 두려움이 가린 얼굴, 그 음습한 사랑의 결말.

안면실인증욕망심리스릴러17금

첫 번째 실수, 혹은 시작

사무실 복도 끝에서 유나가 걸어온다. 향수 냄새가 먼저 날아와 코끝을 간질인다. 새하얀 셔츠 단추가 세 개 풀렸다. 그걸 눈으로 확인했는데도, 그녀의 얼굴이 없다. 아니, 눈앞에 있건만 투명해졌다. 마치 사진 한 장에 인물만 지워버린 듯. 그 빈자리에 향기만 남아 머리카락 사이를 기어오른다. 숨이 막혀 돌아선다. 그래야 겨우 숨을 쉰다.


욕망이 가져간 초상화

안과 진단서는 1.0이다. 안경도, 수술도 소용없다. 세상이 다 선명한데 유나만 흐릿하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 망막에 찍히지 않는 얼굴이 머릿속에서는 더 또렷해진다. 코끝의 각도, 입술이 자주 마르는 질감, 눈가의 잔주름까지. 눈이 거부한 대상을 뇌가 더 탐닉해 그린다.

"못 보는 게 더 간지럽혀."

남들은 그녀를 똑똑히 바라보며도 결코 닿지 못한다. 나만 유나를 ‘못 보는’ 특권을 가졌다. 그 불가능한 근접이 핏줄을 뜨겁게 달군다. 시야에 없는 그녀가 가장 가까이 느껴진다.


희수의 일기장, 4월 7일

카페 테이블. 희수가 노란 수첩을 민재 앞에 내밀었다. 한 장이 열려 있다.

‘나는 네 눈을 보면서도, 너는 나를 보지 못해.’

민재는 눈썹을 찌푸렸다. 고개를 기울여도 동공이 희수의 눈에 닿지 않는다. 시선은 희수 바로 옆 공허만 맴돈다.

“누가 쓴 거야?”

희수는 말이 없다. 민재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녀는 사라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수첩만 남았다. 왜 하필 그녀만 투명해지는 걸까.


지수와 현우, 2층 창고

지수는 현우의 뒷모습을 쫓아 담배 연기 속으로 들어간다. 현우가 돌아본다. 시선이 마주치지만, 현우는 지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누구세요?”

지수가 한 걸음 다가선다.

“나야.”

현우는 눈을 비벼댄다. 담배 끝이 지수 가슴팍 앞에서 흔들린다. 그래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손등으로 눈을 문지른다.

“눈이 이상해. 너무 아파.”

지수는 속삭인다.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냐. 네가 두려워하는 대상만 안 보이는 거지.”


안면실인증 증후군, 혹은 마음의 반사

신경과학자들은 이를 ‘감정적 안면실인증’이라 부른다. 뇌 검사에서 Fusiform Face Area가 특정 대상 앞에서만 혈류가 떨어진다. 병리가 아니다. 욕망이 시야를 침범하는 방식이다. 유나는 너무 강렬해 두려움이 시신경을 덮었다. 눈이 아닌 마음이 가렸다. 사랑과 거부가 동시에 시작되는 지점.

"못 보는 게 아냐. 보지 못하는 거야."


숨겨진 초상을 다시 그릴 때

지난 밤, 유리창에 비친 내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검은 구멍이 박혀 있었다. 맹점이 아니라, 유나의 실루엣을 삼켜버린 구멍이. 그 깊이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울린다. 흐릿하게, 아주 오래된 테이프처럼. 나는 그 구멍을 뚫고 그녀를 다시 보려 한다. 그러나 손끝만 닿을 뿐, 시야는 여전히 텅 비어 있다. 그 빈 공간이 말해준다. 사랑은 종종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시야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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