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결혼식 3주 전, 문 앞에 놓인 검정 봉투 하나

웨딩드레스를 입은 순간, 과거의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가 알고 떠난 건 내가 아니라, 내가 숨겨왔던 진짜 나였다.

결혼 전 도망과거 폭로권력 심리집착금기관계 파탄

흰 웨딩드레스 위에 떨어진 한 방울 피

  • 수진아, 오늘 예식장 사진 확보됐대.
  • 한복 들락거릴 베이비룸도 확인했어.

나는 전화 너머 수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식장 앞에서 서 있는데, 어깨 위로 빗방울 하나 떨어졌다. 아니, 빗방울이 아니였다. 검고 끈적이는 무언가.

한 달 전 그가 말했다. "니가 어떤 과거든 난 상관없어. 우리 앞일만 보면 돼." 그 말이 믿기지 않아서 계속 물었다. 정말 괜찮냐고. 정말 끝까지 괜찮을 거냐고.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오히려 불안감이 커졌다. 왜냐고? 그 눈빛이 너무 깨끗했으니까.


욕망은 고해성사처럼 끝이 없다

사람은 왜 자기를 증명하려 드는 걸까. 나 역시도 그랬다. 매일 밤, "혹시 내가 가진 걸 다 내보여야 그가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나는 흘려버릴 수 있었던 과거 하나를 굳이 꺼냈다. 생채기처럼 아물었던 기억을 다시 찢었다.

그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시험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날 봐. 진짜 나를 다 봐. 그래도 괜찮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공포일 거다. 어차피 모든 관계는 끝나니까.

"나는 너를 떠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네가 날 떠나게 만들려고 했어."


실화처럼 쓴 두 개의 거짓말

첫 번째, 민재의 식탁

민재는 내가 아침 9시에 유치원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여자라는 걸 알았다. 그 유치원은 우리 애가 다닌 곳이었다. 아이는 아빠가 없는 대신 새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민재는 내가 남편 친구와 한 달 동안 숨 막히는 관계를 가졌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아는 남편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도.

우리는 약혼식 직후 진지하게 앉았다. 민재는 커피를 한 입도 마시지 않고 물었다.

  • 너도 그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했어?
  • 아니.
  • 그럼 왜?

왜였을까. 잠깐, 엄청 잠깐, 나는 죽어가는 남편보다 뜨거운 남자의 손끝이 더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게 다야. 그리고 그 단 한 번의 선택이 평생 따라다녔다.

민재는 결국 그날 밤 짐을 쌌다. "사람이 과거를 안 봐주면 못할 말은 아니야. 나도 못 볼 뿐이지."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두 번째, 나영의 시계

나영은 결혼 2주 전에 남자친구에게 과거를 털어놓았다. 19살 때 불법 투약으로 6개월 형을 살았다. 남자친구는 보호관찰 끝난 증명서를 들여다보고 말했다.

  • 너네 엄마가 나더러 이걸 꼭 봐달래?

나영은 그 말의 의미를 즉시 파악했다. 장모님이 준비한 검은 봉투였다. 자기 딸이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한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고스란히 담은 증거. 남자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엄마가 먼저 알았으면 나도 몰랐을지 몰라.

그날 밤, 남자친구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영은 이틀 뒤에야 그가 떠났다는 걸 알았다. 웨딩홀 계약금을 포기하고 해외로 출장 간다는 문자 한 통만 남겼다. 이후 연락은 두절.


우리는 금기를 사랑한다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사람은 죄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 순결한 사람을 원한다고. 그건 자기 모순이 아니라 보상 심리다. 네가 가진 흠집만큼 상대의 투명함을 강제한다. 그래서 과거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관계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긴다.

"니가 날 용서할 수 있다면 그건 네가 더 높은 곳에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사실 민재도 나영도, 그리고 나도, 우리는 희생양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다 알았으니까 떠나도 돼. 그래봤자 우리가 원한 건 떠나지 않는 거였지만. 떠나지 않는다는 건 곧 내 과거를 공인한다는 뜻이니까.


나는 아직도 그 질문을 받고 있다

결혼식장 앞에서 안내 데스크 직원이 물었다. 신랑은 아직 도착 안 햐셨냐고. 나는 웃었다. 아니, 여기 있다고. 나한테서 도망친 남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에 있다고. 그가 내 과거를 알고 떠났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오랫동안 지켜준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확신이, 나를 아무도 떠나지 못하게 만들 테니까.

너는 정말 그 사람이 몰랐으면 좋았을까? 아니면, 너는 그 사람이 아는 척하며 떠나길 바랐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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