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를 처음 본 건, 준수가 소개하기 전이었다. "이 사람이..."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20년 동안 나를 익살스럽게 부르던 그 입이 그녀 앞에선 나의 이름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준수의 눈빛이 내게서 아주 멀어졌다. 마치 두 시간 전까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댔던 그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가 나를 '친구'라고 부르는 대신에. "아,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가 내 이름을 숨긴 이유
나는 왜 그 한마디에 이렇게 화가 났을까. 단순히 우정이 서운해서가 아니었다. 뭔가 더 깊은 곳이 아려왔다.
준수의 목뒤에 있던 작은 점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술에 취해 그의 머리 위로 흔들리던 전등 아래. 우리는 너무 가까워서 서로의 숨결이 뺨을 간질였다. 그때마다 내 손이 그의 목뒤로 가는 건 우연이었을까.
그는 알고 있었다. 나와 그 사이에 존재하던, 이름 없는 그 무언가를. 그래서 지웠다. 새로운 여자 앞에서 나를 지워버렸다. 마치 둘만의 비밀을 숨기듯. 아니, 오히려 비밀 앞에 갇힌 듯.
욕망은 이렇게 가혹하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곳에서 가장 시끄럽게 울린다.
민서의 이야기: 지워진 새벽
새벽 2시, 홍대 뒷골목 술집. 민서는 맥주 캔을 꾹 눌러 찌그러뜨렸다.
"올해도 생일 같이 쇠는구나." 준혁이 웃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그랬다. 12년. 민서가 준혁이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생 때였고, 매년 생일은 둘만의 전통이 되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준혁에게는 이제 새로운 전통이 생겼다.
"혜지랑 같이 쇠려나 봐." 민서가 말했다. 혜지. 준혁이 데뷔한 지 3개월 된 여자친구. 민서는 혜지의 인스타그램을 봤다. 준혁이 민서에게 하던 모든 걸 혜지에게 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넘기는 것도, 뒷목을 쓸어주는 것도.
그날도 그랬다. 우연히 마주친 거리에서, 준혁은 민서에게 손을 흔들다가 혜지가 보는 순간 손을 내렸다. 마치 민서가 불온한 존재였던 것처럼.
"우리가 뭘 숨기고 있었던 거냐고, 나는 생각했어.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우개가 되어버린 손
현정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5년 전, 그녀와 경수는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잔물결이 가슴을 간질일 때, 경수가 속삭였다.
"이거... 진짜 친구로는 아닌 것 같은데."
현정은 웃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경수는 점점 현정을 피했다. 연락이 뜸해졌고, 만나면 어색해졌다. 그리고 2년 뒤, 경수는 새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소개팅으로 만났어." 경수가 말했다.
현정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 달 전에 우연히 경수와 그 여자가 먼저 만나던 장면을 봤다. 그때도 경수는 현정에게 "야, 오늘 회사 회식이 있어서 늦을 것 같아"라고 했었다.
두 남자는 똑같았다. 나를 지우는 손이, 한때는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손이었다.
왜 우리는 이런 상황에 끌리는가
심리학자들은 이를 '미묘한 경계'라고 부른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감정보다 훨씬 강렬한, 보이지 않는 감정의 늪.
우리는 왜 친구와 사랑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는 걸까.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속에서만 우리는 진짜 욕망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준수는 알고 있었다. 민서도 알았다. 현정도, 경수도.
그들은 사실 누구를 지우려 했던 걸까. 나를, 아니면 자신을.
당신도 누군가를 지워본 적이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당신도 누군가 앞에서 어떤 이름을 꿀꺽 삼켰을지 모른다. 그 이름이 당신의 진짜 욕망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지웠을까. 지우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한 번도 지우지 않은 적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