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아프면 어떡하지?”
그가 물었을 때, 나는 이미 예린의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옷장 위에 놓인 아로마 디퓨저가 은은한 라벤더 향을 뿜어내는 사이, 커튼 사이로 스며든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눈동자를 향해 34도 각도로 내려앉았다. 익숙지 않은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공기 자체가 두꺼워졌기 때문인지, 그녀는 겨드랑이에 손을 밀어넣었다가 슬슬 뺐다. 스물두 살, 그러나 손톱을 물고 있었다. 침대 시트 위로 흩날린 복사용 머리카락 한 올이 흰색 린넨 위를 미끄러지며, 그녀의 숨소리는 가쁠 듯 잔잔할 듯, 내 가슴을 간질였다.
“등 뒤로 손 넣을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끝이 스치는 순간 피부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마에 맺힌 가느다란 땀방울이 내 엄지에 묻었다. 그 찰나, 그녀의 눈이 나를 마주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 눈앞에서 그녀의 목젖이 굴러 떨어지며, 이마에 낀 앞머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이내 살짝 풀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새어 나온 저음의 재즈 베이스가 방 한복판을 흔들었다.
숨겨진 경쟁심
나는 고백한다. 대학 신입 때, 한 남자가 술자리에서 떠벌렸다.
‘우리 과에 처녀는 둘뿐이래. 누가 먼저 뜯느냐고 내기했음 ㅋㅋ’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꽂혔다. 당시 나는 연애경험 두 번, 그것도 허무하게 끝난 적밖에 없었다. 그래서인가. 처녀의 몸을 ‘열었다’는 전리품 하나면 내 서러운 어깨가 한껏 펴질 것만 같았다. 욕망의 핵심은 **‘첫 페이지를 넘기는 맛’**이었다. 순수를 넘긴다, 라는 잔혹한 상상이 뇌리를 간질였다. 그 찢어짐의 순간, 나는 어떤 남자들보다 커다란 ‘남자’로 증명될지도 모른다는 환상.
예린과 두 번째 데이트
예린은 인문대 도서관에서 알게 된 여자였다. 첫 키스만으로도 얼굴이 화끈해지던 아이. 그날도 같이 봤던 영화에서 키스 장면이 나오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빠, 나… 처음이에요.”
그 말에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처음’**이라는 두 글자가 가슴을 사정없이 옥죄었다. 그녀의 손을 잡으니 차가웠다. 손바닥에 맺힌 미세한 떨림이 내 떨림으로 옮겨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잠이 들었다. 창밖 가로등이 그녀의 뺨 위로 번쩍일 때마다, 나는 불안감에 다시금 숨이 막혔다. **‘순수’**라는 단어가 도발적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미진의 눈물
한 달 뒤, 미진은 친구의 소개팅, 디자인학과 졸업반이었다. 술집 뒷골목 포장마차에서 둘이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올라오자 그녀는 속삭였다.
“사실… 난 아직 못 해봤어.”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 누르고 있던 갈증이 터진 건지,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천천히 할게.”
허나 막상 방에 들어서자, 미진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냥… 무서워요.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 눈물은 예린과는 또 다른 종류였다. 두려움과 기대,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절망이 뒤섞인 거대한 태풍이었다. 나는 그녀의 뺨을 닦아주며 위로했지만, 동시에 머릿속 한편에서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처녀, 혹은 신화를 뜯어내는 손맛
인간은 왜 처녀에게 집착하는가. 단순한 수집욕은 아니다. 우리는 **‘처녀’**라는 단어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고대 신화를 재현한다. 처녀는 동시에 순수와 파괴 가능성을 품은 신성한 땅. 그 땅을 개간하는 자는 곧 영웅이 된다는 오만한 환상. 프로이트는 말했다. 집착의 본질은 **‘결핍의 상징’**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현대 사회에서 처녀는 더 이상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아무도 못 건드린 정체성’**이란 프리미엄 상품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먼저 ‘열어버리면’ 어떡하지? 그 순수의 땅에 이미 남의 발자국이 찍혀 있으면?
너는 정말 순수를 원하는가?
문득 예린과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속옷을 벗기려다,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던 말.
“오빠, 진짜 나 괜찮아요… 근데 오빠 표정이… 무서워요.”
그때 나는 알았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그녀의 고통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첫 번째 문장’**을 넘기는 순간,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품고 있었다. 순수를 벗긴다는 건, 동시에 내가 품고 있는 더러운 욕망을 고백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밤, 그녀를 꼭 안고 잠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그녀의 떨림을 가슴에 새기며, 나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그녀가 내 뺨을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