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그녀를 만나기 전날 밤, 나는 아직 메모장을 닫지 않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녀에게 던진 경고장. 두려움보다 선명한 확신, 그리고 닫히지 않은 메모장.

연애예고된 이별메모결말경고장

11시 47분, 카페 모퉁이

준오가 내 핸드폰을 낚아챘다. 화면엔 메모장 하나, 제목은 ‘내일’.

그녀는 내가 사진에서 본 것보다 작고 따뜻하다. 그녀는 한 달 뒤 “우리 속도를 좀 늦출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 너머의 9문장은 닫혀 있다. 준이가 눈을 부라렸다.

“너 아직 얼굴 한 번도 안 본 애한테 이별 각본을 써놨잖아.”

나는 모른 척 아메리카노를 벌컥 들이켰다. 벌써 미래가 혀끝에 차갑게 박혔다.


예행연습

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기 전날, 그가 차갑게 돌아설 장면을 먼저 떠올릴까.

그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될 것이고, 그녀는 떠날 것이라는. 그 전망이 너무 선명해서, 가슴이 끊임없이 쥐어졌다 풀렸다.

혹시 나는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사랑하기 위해 상처를 미리 연습하는 걸까.


과거의 단편들

1. 민서

2019년 3월, MT 첫날 밤. 동아리 선배 민서에게 보낼 카톡을 27번 지웠다.

“나는 당신과 맥주 한 잔 하면서 나의 반쪽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될까요?”

14분 뒤 답장. “ㅋㅋㅋ 왜 반쪽이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부끄럽네’가 올 8시 27분에 도착할 거란 걸. 그래서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다.

2. 수진

2021년 가을, 번개팅 앱. 디자이너 수진과 매칭됐다. 나는 그녈 만나기도 전에 ‘퇴근 후 지하철 2호선 대기실에서 시선이 부딪힐 것’이라 찍었다. 그날 밤 그녀 집 앞 편의점 지도까지 뒤졌다.

만남은 짧았다. 우리는 서로의 말 대신, 아직 오지도 않은 *‘잘 만났어요, 그런데…’*를 주고받았다.


0시 12분, 나는 아직 메모장을 닫지 않았다

이제 그녀를 만나러 나선다. 11문장 중 공개한 건 단 두 줄뿐, 나머지는 닫힌 봉투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

그녀가 이 메모장을 본다면,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을 연다. 밖으로 나서는 순간에도 메모장은 여전히 열려 있다. 문장들이 숨을 죽이고, 아직 쓰여지지 않은 결말을 기다린다.

화면이 꺼지지 않는다. 그 빛이 새벽 거리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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