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벗고 누워."
침대 끝에 앉은 재민이 나지막이 말했다. 평소엔 안경 벗으면 잘 안 보인다고 살짝 짜증냈는데, 오늘만은 달랐다. 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눈빛이 너무 똑바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안경을 탁, 탁, 두 번 네게 맡기며 손가락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 짧은 잠깐, 질척이는 소리가 침실 가득 울렸다.
그리고 재민이 말했다. 단 한마디였다.
"지혜 씨, 당신이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지르면 어떨까."
뱀처럼 스며든 맛
순간 몸이 굳었다. “뭐?”라고 되물었지만, 입술이 말라 소리가 안 나왔다. 재민은 내 어깨에 입을 대고 한숨을 뱉었다. 뜨거운 숨결이 가슴을 간질였다.
내가 왜 화를 내지 않는지, 왜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지.
그때서야 알았다. 화가 아니었다. 이건 또 다른 맛이었다. 이름 석 자를 입에 담는 순간, 낯선 남자와의 상상 한 편이 깜짝이며 피어올랐다. 내가 상상한 건 누구였을까. 아무튼 재민은 아니었다.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입을 다물고 끝까지 끝냈다. 침묵이 너무 커서 숨죽여야 했다. 재민의 손길이 침대 시트를 움켜쥘 때, 내가 아닌 누군가의 이름이 그 손끝에 새겨진 듯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그림자
두 달 후, 회사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오늘도 재민이 시킨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달아올랐다.
문이 열렸다. 안에는 승현이 서 있었다. 팀장님. 까만 양복 입고 선글라스 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 1층 가시죠?
나: 아, 네…
순간 머릿속에서 재민의 목소리가 울렸다. “승현 씨라고 불러봐.” 나도 모르게 입이 떨어졌다.
나: 승현 님… 아, 죄송해요. 팀장님.
그가 키를 누르는 손이 살짝 멈췄다. 반응이었다. 좁은 공간에 숨이 꼬이는 게 느껴졌다. 이건 시작이다 싶었다. 열린 문 너머로 나가면서, 승현이 등 뒤로 내민 손이 살짝 내 허리를 스쳤다. 실수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그날부터 나는 승현 앞에서 ‘팀장님’이라는 말을 멈췄다.
극장 뒷자리, 핑크빛 속삭임
한 달 뒤, 친구 수진이랑 영화관. 재작년에 결혼했단 얘기만 듣던 그녀가 내 귀에 속삭였다.
수진: 나도 그래. 남편이 “네가 다른 남자 좋아한다고 생각해도 돼?”라고 물었을 때 처음엔 어이없었어.
근데 막상 말하니까… 미친 듯이 흥분되더라.
나는 팝콘을 입에 쑤셔 넣으며 물었다.
나: 그래서?
수진: 그날 이후로 ‘진우’라는 이름을 써. 우리 팀 후배.
진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눈 감으면 얼굴이 그려져.
남편은 내가 진우라고 부를 때마다 눈알이 뒤틀려.
이상하게도 그 표정이 너무 좋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나만의 비밀이 아니었다는 걸. 수진의 입술이 새빨개졌다. 두 여자는 같은 맛에 중독된 것 같았다.
왜 우리는 이 맛에 끌리는가
사람은 누구나 ‘금기’를 향해 숨겨진 현관문을 두드린다. 누구의 이름이라도, 누구의 손길이라도. 중요한 건 ‘거짓말’일 가능성이다. 진짜로 만난 남자가 아니라, 상상 속으로만 존재하는 연인을 섞는 행위. 그 순간, 현실보다 더 선명한 쾌감이 밀려든다.
집착의 본말은 결국 ‘빼앗기는 기쁨’이다. 내가 ‘팀장님’이라 부르던 그를, 승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잡는 순간. 나는 이미 재민에게서 떨어져 나온 채였다.
그리고 더 두려운 건, 재민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상상하는 남자의 이름을 요구할수록, 자기 자리가 흔들린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를 맛보는 대신, 서로를 다른 맛으로 바꾸는 중이다.
닫히지 않는 문
오늘 밤, 침대 끝에 앉은 재민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윤호’라고 해봐."
윤호. 아는 이름도 아닌, 모르는 이름도 아닌. 단지 두 음절의 환상일 뿐.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내 무릎 위로 왔을 때, 이미 ‘윤호’가 내 몸 안에 살았다.
문을 닫을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이 방 안에서 계속해서 누군가의 이름을, 누군가의 욕망을 나눠 먹으며 죽을 때까지 헤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