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아니라 아빠를 먼저 봤나 봐요"
팬톤 민트 색 풍선이 천장을 가득 채운 그 오후, 나는 눈치 없이 웃고 있었다. 서른 둘, 임신 8개월. 코로나 끝나고 처음 열리는 베이비샤워라 어깨가 들썩일 만큼 손님이 많았다. 시은이, 미소, 예린까지 예전 동아리 친구들이 다 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사촌 혜원이.
혜원이는 누가 봐도 ‘예쁜 아줌마’였다. 4년 전 이혼하고 딸 하나 데리고 서울에 올라왔다. 어릴 적도 집 앞 놀이터에서 남자애들이 먼저 다가와 누나, 같이 놀자 했던 아이다. 나는 늘 그런 혜원이가 부러웠다. 부러웠다는 말이 더 낫지, 미워했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니다.
티라미수 케이크를 8조각으로 썰던 순간이었다. 남편 재혁이 뒤에서 내 허리를 감싸며 눈을 찡긋거렸다. 7년 만에 맞는 첫 아기라 모두가 우리를 축복했다. 그때 혜원이가 갑자기 다가와 재혁이 귀속살에 대고 속삭였다.
준혁아, 아직도 목소리가 안 바뀌었네.
준혁. 내 남편 이름은 재혁이다. 혜원이는 태연히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재혁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반응 하나로 나는 알았다. 그들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준혁, 준혁, 준혁. 그 한 음절이 풍선 사이를 빠르게 날아다니며 내 뱃속 아기 발끝에 찔러붙었다.
허리를 감싸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눈치챈 건가? 아니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건가?
혜원이와 나는 사촌이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부모님들이 각각 이혼하면서 집 한 채를 나눠 쓰던 시절, 우리는 새벽마다 서로의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다. 혜원이는 항상 누가 먼저 왔느냐에 따라 자리를 양보했다. 그건 내가 먼저일 수도, 혜원이가 먼저일 수도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의 몸에 이미 익숙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혜원이가 가진 것을 다 가지고 싶다는 욕망. 남자들, 부모의 관심, 심지어 시험 점수까지. 혜원이가 좋아하는 남자를 내가 먼저 좋아했다고 고백하면, 혜원이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래, 네가 먼저. 그 웃음이 가장 무서웠다. 마치 다 내가 가져도 괜찮다는, 그 정도는 애초에 내가 양보한 것처럼.
재혁이랑 처음 만난 것도 혜원이 소개였다. 대학 MT에서, 혜원이는 재혁이와 같은 과 후배였다. 나는 연세가 더 위였지만, 혜원이는 그날도 먼저 손을 잡았다. 우리 언니, 공대 여신이야. 그러면서도 혜원이는 재혁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축제 기간 내내 그들은 같은 조가 되었고, 나는 옆에서 술만 들이켰다.
결국 재혁이는 내게 고백했다. 그때만 해도 혜원이를 아무 생각 없는 후배로만 봤다고. 하지만 나는 알았다. 혜원이가 이 남자를 양보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걸. 그리고 그게 진짜 양보인지, 아니면 내가 집착하게 만들기 위한 함정이었는지는 오늘에서야 확실해졌다.
아기양말 사이로 스민 딸기향
혜원이는 아기선물로 직접 뜬 양말이랑 손수건을 가져왔다. 딸기향이 나는 비누였다. 그 향이 재혁이 손에 배어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재혁이는 혜원이가 만든 비누를 아무 의심 없이 썼다. 아니, 쓰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너희 재혁이, 아직도 술 마시면 안색이 새파래지더라.
그래도 참 잘 참더라. 우리 재혁이.
혜원이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우리 재혁이라고 했다. 누가 누구 재혁인지 지정하는 것처럼. 손님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웃고 있었다. 딸기향 손수건이 내 뱃속 아기에게로 흘러들어가는 듯했다. 그 향이 머무는 곳마다 내 아기는 혜원이 냄새를 맡으며 자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화장실에서 토했다. 붕대처럼 감긴 배 위로 구토가 쏟아졌다. 혜원이가 따라와 등을 토닥였다.
아이고, 괜찮아? 예민해지는구나.
그때도 혜원이는 내 허리를 잡고 있었다. 그 손끝이 나의 몸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부드러움이 아니라 익숙함이었다. 혜원이는 내 몸을 너무 잘 알았다. 어릴 때부터 나의 가슴 한쪽이 더 큰 걸, 허리 뼈가 약간 휘어 있는 걸. 그리고 아마, 지금 이 배 위로 흐르는 임신선까지.
왜 우리는 늘 똑같은 남자를 원할까
사촌은 가장 가까운 남의 여자다. 남의 여자가 된 나는, 이제 혜원이에게도 남의 여자다.
본능은 복잡하지 않다. 우리는 유사한 유전자를 지닌 이성을 선택하려 한다. 그게 사촌일수록 더 강하다. 혈연이 아니라 유사성이다. 같은 집에서 자라며 익숙해진 냄새, 말투, 심지어 슬픔의 방식까지. 결국 재혁이는 혜원이와 나를 동시에 원했을 수도 있다. 아니, 혜원이를 먼저 알았다면 나를 선택했을까.
나는 혜원이의 이름을 재혁이와 함께 불렀다. 연애 초반, 술에 취해 혜원이는 언제 와? 라고 물었다. 재혁이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혜원이는 너랑 똑같이 생겼대. 그 말이 지금 생각하면 훅 와닿는다. 우리는 닮았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웃을 때 왼쪽 뺨에 주근깨가 하나씩. 재혁이는 이중에 누굴 먼저 봤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준혁이라는 이름을 실수로 부를 정도로.
사람은 늘 자기가 잃은 것에 집착한다. 혜원이는 내가 가진 걸 잃었고, 나는 혜원이가 가진 걸 잃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남자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우리 사이를 가르는 칼날이 되었지만, 동시에 우리를 다시 연결하는 실이기도 했다. 이젠 끊을 수 없는 실이다. 아기 때문이다. 아기는 혜원이 냄새도 알고, 재혁이 피도 타고, 나의 복수도 품고 태어날 것이다.
민트색 풍선이 터지는 밤
모두가 떠나고 나자 집은 조용해졌다. 풍선 하나가 서서히 공기를 잃으며 주저앉았다. 재혁이는 샤워를 하러 갔다. 나는 혼자 거실에 남아 선물을 정리했다. 그때 눈에 띈 것, 혜원이가 남긴 아기 카드. 속에는 손글씨가 있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 아기 이름은... ‘준호’ 어때?
준호. 또 준. 나는 카드를 찢었다. 조각조각 흩날리는 종이 위로 재혁이가 나왔다. 머리를 터벅터벅 닦으며 말했다.
혜원이랑 오늘 아무 일도 없었어. 미안해, 준혁이라고 한 건...
말이 잘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슴으로 다가가 뺨을 때렸다. 한 대, 두 대, 셋. 재혁이는 그냥 받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혜원이는 너였어.
나는 웃었다. 어린 시절 혜원이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기는 누구 편일까
혹시 당신도 사촌, 친구, 혹은 엄마의 목소리로 남편의 이름을 불러본 적 없는가. 그때 당신은 누구였는가. 그리고 지금, 여기서 다시 불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