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임신했어.”
유리컵에 맥주 거품이 아직도 떠 있던 목요일 저녁, 다혜는 핑크색 스트로를 입에 문 채 그걸 말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한 달 전 끝난 관계, 그리고 아직 고장 안 난 콘돔 하나. 이건 농담이 아니야, 이건 선고야.
그러나 다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꺾였다. 그리고 터졌다. “만우절이야, 바보야.”
나는 웃어야 했다. 웃어야만 했는데, 손에 들린 와인 잔이 떨렸다. 와인 한 방울이 하얀 테이블보에 떨어지며 번졌다. 빨간 얼룩 같았다.
“진짜”로 되길 바랐던 순간
‘아니면 어쩌지?’ 싶었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좋겠다’고 중얫거렸다.
우리는 왜 가짜 임신에 화를 내는가.
화가 아니라, 실망 아닌가. 실은 내가 일부러 고장 낸 콘돔이라도 있었을까, 싶어서. 내가 모르는 사이 원했던 것 아닐까. 임신이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야 하잖아. 그래서 다시 끌어안아야 하잖아.
아니면,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래서?”라는 말이 술렁였던 것도 모른다.
그래서 결혼이라도 해? 그래도 난 너밖에 없어?
그만큼 어리석은 갈망이었는데, 다혜는 그걸 농담으로 만들었다.
지나가던 여자들, 그날의 진실
사례 1. 은채 – 29세, 마케터
은채는 지난해 만우절 날, 전 남자친구에게 카톡 한 장 보냈다.
[오늘 병원 다녀왔는데, 6주.]
상대는 3분 만에 전화를 걸었다. 은채는 받지 않았다. ‘농담이야’라고 답장하려다, 손이 떨려서 그만두었다.
정오쯤, 그가 회사 대문 앞에 나타났다. 숨이 헐떡거렸다. 두 손엔 알약이 담긴 봉지와, 현금 봉투.
“약 먹지 마, 나랑만 살자.”
그 순간 은채는 알았다. 자신이 원했던 건 “농담이야”가 아니라, “그래도 괜찮아”였다는 것을.
그래서 그날 밤 결국 임신 사실을 고백했다. 임신 따위 없었다. 그러나 그가 기쁜 얼굴로 안아줄 때, 은채는 눈물이 났다. 왜냐하면 그 눈물은 속았다는 걸 뜻했으니까.
사례 2. 지민 – 34세, 개발자
지민은 진짜 임신 중이었다. 11주. 아기 아빠는 2년째 연락 끊긴 전 남편.
만우절 아침, 그는 전 남편에게 장난스레 문자를 보냈다.
[오늘 아침에 가슴이 너무 아파서 병원 갔더니… 아가 있대.]
반응은 차갑고 짧았다.
[농담이면 너무 저급하다.]
그 후로 읽씹. 지민은 병원비 영수증 사진을 찍어 보내려다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는 “농담”이라고 결론 짓는 순간, 이미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지민은 유산했다. 13주.
그날도 만우절이었다.
가짜 임신은 왜 우리를 홀려는가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허위 임신 착각(fictional pregnancy lure)’이라 부른다.
사실은 내가 더 원한다.
아기란 결국, 관계를 세탁하는 마지막 프라이머다.
“그래도 아기 생기면…”
“아니면…”
이 말은 ‘헤어진 우리’를 ‘가족’으로 만들 수 있다는 무딘 확신.
그러나 가짜 임신은 그 확신을 부순다.
*“진짜라면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니까.
마지막 질문
그날 밤, 나는 다혜에게 물었다. “만약, 진짜였다면?”
다혜는 맥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그럼 너는 어땠을까?”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절 아침마다 시험지처럼 흰 소변 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향하는 여자는 계속 있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에게 보내지 못한 마지막 ‘농담’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임신 사실을 “진짜”라고 말하고 싶은가?